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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기술 첫걸음에서 비상까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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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2-12-30 16:44:10

본문

X-카 포니엑셀 프로젝트-7

2000년도에 개봉한 영화‘에린 브로코비치’를 보면 여주인공 에린(줄리아 로버츠)이 타고 다니는 차가 포니엑셀(국내 차명은 프레스토)이다. 미국에 수출한 한국산 자동차가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하는 영화에 나온다는 것에 뿌듯한 마음을 가질 듯도 한데,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한 까닭은 무엇인가?

글 /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
출처 / 한국자동차공학회 오토저널 2012년 6월호

주인공 에린은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당장 생계를 걱정하는 이혼녀로 세 명의 아이와 함께 74달러의 은행 잔고가 전부인 몹시 가난한 사람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에린의 초라한 삶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포니엑셀 승용차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1986년도부터 미국에 상륙한 포니엑셀은 초년도부터 선풍적인 인기로 엄청나게 많이 팔려 초년도 16만 8천 대, 1987년 26만 3천 대, 1988년 26만 대를 판매하여 아직까지 아무도 깨지 못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1989년부터 판매가 급감하여 그 해에는 18만 대, 1990년도 14만 대, 1991년도에는 12만 대로 내리막을 거듭했다. 한때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포니엑셀이‘못사는 사람들이 타는 차’의 상징으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또한 포니엑셀의 후속차인 엑셀(1989년 4월 양산)마저도 미국시장에서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철저히 외면 당해 저조한 판매를 기록한 것 이었다. 영화 속 에린은 거대기업을 상대로 하는 소송에서 승소하여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 중에 포니엑셀은 미국산 GM의 쉐보레 블레이저로 바뀌게 된다.

최근 미국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현대자동차는 예전 수모를 당했던 시절과는 사뭇 다르다. 고급차종인 제네시스와 에쿠스까지도 미국시장에 진출하여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고품질’과‘부와 성공’의 상징이 조만간 한국산 차량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면서 X-카 포니엑셀 미국진출에 대한 마지막 호를 정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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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도에 포니엑셀을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해서 만 1년이 지난 1987년 5월에 3주간의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 판매법인(HMA)과 지역별 딜러점, 대쓰밸리(죽음의 계곡)와 피닉스 같은 사막과 열대지역, 미국에 설립한 현지 연구소 등 미국 전역에 걸쳐 둘러보는 바쁜 일정이었다. 우리 차에 발생된 산발적인 문제점들에 대해 현장에서 듣고, 확인하는 출장이었다.

현장에서 미국 고객들의 자동차에 대한 주된 관심사와 문제점들을 직접 들어보려는 목적이었다. 그들의 자동차문화에 대한 대륙적 생각이나 개념 자체가 유럽과도 엄청나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배우는 기회였다. 감성적인 지적도 엄청나게 다양하다는 것을 느꼈던 아주 값진 출장이었다. 그들의 투명하면서도 솔직하고 다양한 의견들을 다 맞추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돌아오는 무거운 여정이었다. 그동안까지는 수출부문의 보고서 등을 통해서나 문제점을 접해왔지만 현장에서 문제점을 실감나게 직접 보고 들으면서 체험한 것이다.

LA 근교의 가장 높은 산인 발디 마운틴에 포니엑셀과 경쟁차들(주로 일본차들)을 끌고 올라가서 등판성능을 비교해 보았다. 산악지역의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엔진 파워가 부족하다는 얘기가 이해되었다. 배기가스 규제에 급급했던 나머지 고산 산악지역에서의 추월성능은 시험조차 해보지도 못했고, 한국에서는 시험할 방법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당시로는 우리가 손댈 수 없는, 미쓰비시가 설계한 엔진 자체에 대한 문제점들도 많았다. 우리가 비싼 로열티를 주고 도입한 미쓰비시 엔진이 도요타나 혼다의 동급엔진과는 차이가 있었다. 경쟁 차량들과 우리 차량을 직접 비교 운전해보면서 차이점을 확실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자동차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단순히 조립만하여 냉혹하기만 한 미국의 자동차 시장에 수출한 셈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우리 차량의 문제점들을 들으면서 그동안 어렵게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되는 출장이 되었다. 하소연을 들어줄 유일한 상대를 다시 찾은 것이다. 6개월 만에 다시 내뿜어 보는 애연의 맛이야말로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해 본 사람만이 이해하리라 믿는다.

라스베가스와 피닉스를 들러서 열대지역의 일그러져있는 포니엑셀도 직접 보았다. 리어 콤비램프가 피닉스의 강렬한 자외선에 녹아 찌그러져 있었다. 모 대학 화공과 출신의 사장이 경영하는 부산의 P부품회사에서 자신 있다고 제작한 램프의 렌즈 재질이 녹아서 변형된 것이다. 엔진과열 차량은 라디에이터 그릴을 떼어내니까 그때서야 비로서 냉각수 온도 게이지가 레드존에서 정상으로 내려왔다.

넘어야 할 산은 높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실감했다. 도요타나 혼다로부터 새로운 엔진을 들여와서 다시 시작하든가, 아니면 우리가 손을 들든가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는 출장이었다. 아니면 미쓰비시로부터 독립해서 우리가 도요타나 혼다를 이길 수 있는 엔진개발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는 1992년에 독자개발 엔진인 알파엔진 양산을 목표하여 1989년부터 투자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정주영 회장 말고는 이 엔진이 성공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서 국내 마북리 연구소뿐만 아니라 디트로이트 소재의 현지 연구소에 파워트레인 연구인력이 대폭 보강되기 시작했다.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죽음의 계곡이나, LA에서 라스베가스까지 뜨거운 사막
을 6시간씩 달리면서 열 받지 않을 브레이크가 어디 있겠는가? 브레이크가 열 받으면 제 역할을 못하는 페이드 현상 문제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브레이크 건으로 리콜이 9건이나 걸려 있었다. 모하비 사막에서는 크래쉬 패드와 같은 플라스틱 부품들이 고열에 의해 녹아 내리는 일들도 속속 발생하고 있었다. 라스베가스나 LA가 사막이라는 사실도 처음알게 되는 여행(?)인데다가 미국에는 사막이 그렇게 넓게 산재해 있다는 지리공부 체험이기도 했다. 현대자동차 미국 판매법인(HMA)에서는 혼다에 비해 열악했던 당시 애프터서비스 체제에 대한 불평(?)도 늘어놓았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들이었다.

미국 포드에서 PL(Product Liability) 관련 근무 경험이 있는 경력자를 채용하고 있었고, 처음으로 들어보던 PL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한 교육도 받았다. PL이란 것도 경험해 보아야 알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실제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미국 법정에까지 피고로서 기술자들이 불려 다니면서 체험을 한 뒤에야 PL이란 걸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다. 또한 자동차를 통해 미국의 그 많은 변호사들이 여유 있는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일자리의 창출기회가 부여된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 우리가 만든 포니엑셀을 미쓰비시의 브랜드로‘프레시스(Precis)’라는 차명으로 OEM 공급을 해주고있었는데, 미쓰비시의 차량에도 우리와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미쓰비시의 미국 판매법인(MMSA)을 방문했다.

미쓰비시 자체에서 우리와 같은 플랫폼으로 생산해서 수출하고 있던 콜트는 10년 에미션 보증에 5년 차체보증과 같은 품질 보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동일하게 안고 있었을 엔진이나 브레이크에 대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공급한 프레시스는 패키지 트레이가 덜렁거리고, 몰딩 조인트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등의 외관이나 작업성 관련된 문제점들이 주로 많았다. 그들은 품질 문제점들을 우리에게는 다른 각도로 열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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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현지 직원으로부터 포니, 포니엑셀, 스텔라의 그동안 발생된 문제점에 대해 총정리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3주간의 북미 출장 동안 포니엑셀의 2만 개가 넘는 부품들이 모두 다 문제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북미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판을 다시 새롭게짜서 재출발해야 함을 실감했다. 도요타도 1960년대수출 초창기에는 브레이크 시스템을 비롯한 산발적인 문제점들로 한동안 고전했다는 귀띔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유구한 자동차 산업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많은 자동차회사 외에도 이태리의 피아트나 프랑스의 르노가 미국에 진출했다가 철수한 이후로 미국시장에 다시는 기웃거리지 않는 이유도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해답을 갖고 실행한 자들이지 않은가? 반면에 우리는 지금부터 실천해야 할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미국에서 피아트나 르노처럼 철수해도 좋다는 선택은 정주영 회장 외에는 아무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산이 높고 험하더라도 그에게서나올답은뻔한것이다.“ 해봤어?”

최고경영층에서도 미국시장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아가고 있었다. 미국 판매에서의 주춤거림을 감지하고 특단의 조치들이 연일 이어졌다. 품질부문의 인력뿐만 아니라 연구소, 생산기술, 구매개발 등의 기술인력이 대폭 확충되었다. 경험 없는 사람들의 숫자만 늘어날 뿐이었지만 인해전술로 낙동강까지 밀렸던 6.25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였을까?

또한 연구소에는 포니엑셀(X-1)에서 발생된 문제점들을 개선하는 솔루션들을 고심 끝에 내놓기도 했다. 아예 새롭게 출발해서 빠른 일정으로 대체할 후속모델(X-2)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그러나 회사는 이미 너무 많이 커져 있었다. 그동안 시장에 판매되어 애프터서비스를 해야 할 차종도 너무 많이 늘어나 있었다. 승용차 외에도 트럭, 버스까지 구색을 갖추어서 차 종류를 늘려 가고 있었다. 게다가 한 번 개발 된 차량은 어김없이 세계 구석구석에 수출해야 했고, 그렇게 가속도가 붙어있었다.

딜러들은 북미에 수출하기 시작한 포니와 스텔라는 4년에 한 번씩 풀 모델 체인지를 해야 일본차들과 경쟁할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경쟁차에 뒤쳐지지 않도록 1년에 한 번은 메이크업(모델이어 개념의 치장)을 해야했다. 도요타나 혼다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 또한 2년에 한 번은 페이스리프트(성형수술에 해당)를 해야 경쟁이 된다는 수출본부장의 필요조건은 감히 아무도 반대할 수가 없었다.

이 룰은 그 이후 1998년까지 거의 10여 년 동안 미국에서 재기할 때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철칙이 된 셈이다. 중장기계획이 곧바로 이렇게 짜여졌고, 계획된대로 실행할 수 밖에 없었다. 구색을 갖추어서 신제품을 늘려가야 했다. 현대자동차가 자동차 회사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소형급과 대형급 승용차를 새롭게 추가해야 했다. 중소형급의 J-카(엘란트라)와 대형급의 L-카(그랜저) 개발이 진행되었다. 이에 질세라 내수 판매 본부장은 미니카를 추가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었다. 정세영 회장은 신차종을 추가 개발해서 구색을 갖추는 중장기계획을 결정했다.

한편으로는 보듬어야 할 자식 새끼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문제가 생기면 필자를 나무라곤 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자주 모델변경을 해야 하느냐는 질책이었다. 새끼를 만들라고 결정할 때와 속 썩이는 자식 앞에서 돌변하는 정세영 회장이 야속하기까지도 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새로운 차종들을 늘려 개발해야 했고, 식구가 늘어나면 끝까지 잘 키워야 했다. 한번 늘어나면 죽는 법이 없는 새 차종들이고, 실제로 이들은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한 차종도 없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차 종류는 2000년도까지 계속 늘어왔다.

최고경영층은 도요타 수준의 품질을 목표로 하라고 독려했다. 미국 출장을 자주 다니라고도 했다. 우선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라고도 했다. 그냥 그렇게 바쁘게 흘러가야 하는 이야기들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나 성과가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다. 실제로 포니엑셀이 미국에 진출한 지 10년 가까이 지난 1995년, 워싱턴 포스트지의 자동차 특집판에서‘현대 엑센트, 드디어 웃다’라는 기사에서 현대자동차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고 보도하면서‘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생산업체들이 한국인들에 의해 엉덩이를 걷어 채일 판’이라고 하면서 우리차를 호평했다. 포니의 제4세대인 엑센트(X-3, 1994년 4월 양산)가 미국시장에 선을 보였을 때 이를 운전해 보고 쓴 칼럼기사였다.

1987년 여름, 우리나라의 민주화 바람을 타고 현대자동차에 노조가 결성되었다. 울산공장에 노조 설립을 알리던 날 아침 출근길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공장 간부의 차가 주차장에 찌그러져 있었고, 유리창이 깨져있었다. 밀려들어오는 생산 오더, 신차개발, 수출한 차량에서 발생한 많은 문제점 해결을 위해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시기였다. 노조 대의원 선거, 단체협상, 노사분규, 파업 등으로차량 개발과 개선업무는 뒷전으로 물러났다. 협력업체 역시 노사분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정상적인 부품 생산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회사측에서는 생산공장 확장과 기술인력충원에 제동을 걸었다. 부품개발도 이원화하여 협력업체의 노사분규에 대비해야만 했다. 분규에 따른 생산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월 2만 8천대 정도의 생산이 1만 7천대로 크게 줄었다. 이듬해 봄의 노사분규는 더욱 격렬했다.

약 2개월간의 파업과 직장폐쇄 등 회사와 노조 모두 지치고 많은 손실을 입었다. 이렇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딜러들이 중요시하는 포니엑셀의 쇼룸 품질은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노사분규와 함께 환율이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달러 대비하여 원화가치가 절상되어 회사 손익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록을 보면 1987년에 원화 가치가 1.4% 절상되어 200억 원 정도 손해를 보았다. 원화가치가 더 떨어지면 회사가 어렵게 되기 때문에 원가절감을 더 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최고경영층에서는 포니엑셀 원가가 문제라는 인식을 하고 재료비를 30% 정도 줄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인건비를 포함한 경비 절감계획을 수립하고, 국산화가 가능한 부품들을 다시 선정했다. 수입품과 국산화 했을 때의 가격을 비교해 가면서 국산화를 추진했다.

원화 못지않게 엔화의 환율도 중요했다. 당시 엔고에 따라 수출지역에서 일본차량보다 우리의 차가 가격경쟁력에서 유리했었지만, 많은 부품들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자동변속기, 에미션 키트, 히터, 에어컨, 오디오, 브레이크, 베어링, 스타터 모터 등 차종당 약 2천 달러 상당의 중요한 부품들이었다. 미국에서 포니엑셀의 소비자 가격이 5천 달러였는데, 차량 원가의 중요부품들이 일본 수입품들이었다.

일본 메이커들도 엔고 파동에 대비하여 많은 자구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당시 도요타는 C-50(Challenge-50)이라는 운동을 통해 고정비를 50%까지 절감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페이스리프트는 비용절감 측면에서 진행하지 말자는 의견까지 처음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 이전에도 정주영 명예회장은 페이스리프트 투자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자주 얘기하곤 했었다.

필자 역시 힘겹게 개발한 차량을 2~3년 만에 새롭게 다시 바꾼다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을 했으나, 이미 많은 돈을 투자하고 참여한 딜러들을 설득시킬 대안은 따로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캐나다 시장에서 반덤핑(Antidumping)으로 제소를 당했다. 미국에서도 우리의 자동차, 신발, 전자제품 분야에서 무역마찰이 고조에 달해 있었고, 북미 빅-3가 우리 차량에 대해 반덤핑을 제소할 것이라는 소식까지 날아왔다. 국내가격 대비 미국, 캐나다에서 약 15% 정도 저렴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곧바로 반덤핑 전문팀을 구성했다. 새로운 학습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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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현대자동차의 제3세대 소형차인 X-2(엑셀)의 양산이 시작되었다. 기존 X-1 생산라인에서 X-1을 단산하고 X-2 생산라인으로 개조했다. 신차종투입으로 생산라인이 복잡해짐에 따라 기존 차종을 단산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미국시장에서 아직까지도 깨지 못할 포니엑셀 신화를 만들고도 온갖 품질문제로 곤욕을 치렀던 X-1 포니엑셀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되었다.

포니엑셀은 우리들에게 뿐만 아니라 세계 자동차 산업에 많은 교훈과 기록들을 남겼다. 미국 입성 초창기의 선풍적인 인기와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판매기록, 품질문제와 미흡한 애프터서비스에 의한 순식간의 고객 이탈, 한 번 잃은 신뢰를 되찾는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과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귀중한 경험을 현대자동차가 뼈저리게 학습한 것이다.

미국이라는 시장은 북미 빅-3, 독일, 일본 메이커만이 살아남은 치열한 자동차 격전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름도 생소했던 현대자동차는 포니엑셀을 가지고 무모하게 문을 두드렸고, 또한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와는 품질에 대한 눈높이가 확연히 틀린 미국시장을 새롭게 이해하고, 북미 법규, PL, 리콜 등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기회가 되었다. 제이디 파워의 차량 비교평가에서 포니엑셀은 끝에서 세 번째로 좋지 않은 차로 평가가 되고 미국인들의 외면과 그들의 입에서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었지만, 최근에 와서 이를 잘 극복하고 가장 품질 좋은 차 중의 하나로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은 다름이 아닌 포니엑셀의 학습 덕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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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디자인과 미쓰비시의 기술적인 도움을 받아가면서 처음 우리 손으로 개발해본 포니의 경험이 전부였던 시절에 포니엑셀의 개발은 앞바퀴 굴림방식, 풀도어,미국의 엄격한 충돌안전 대응 및 엔진 배출가스 규제 대응 등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사항들을 모두 해결해내야만 했다. 또한 생산공장 증설뿐만 아니라 기술조직과 연구원 확충, 프루빙 그라운드와 같은 대규모의 시험시설도 차를 개발하면서 갖추어 나갔다. 기술구걸을 통해 배우고, 등 너머로 학습한 사항들을 기초로 하여 우리만의 개발 프로세스도 나름대로 정립한 셈이다. 맨땅에 헤딩을 하면서 학습한 것이다.

포니엑셀을 개발할 당시에는 스텔라도 동시에 개발하는 바람에 부족한 연구인력과 시설을 나누어 써야 했다. 열악한 국내 부품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중요한 시스템의 요소기술도 업체간 경쟁과 해외 선진업체와 기술제휴를 통해 학습한 셈이다. 미국시장에서의 품질문제로 판매가 급감하자 일부에서는 우리의 품질 수준 향상에 한계가 있고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포니엑셀 이후에 미국향으로 개발한 X-2(엑셀), Y-2(전륜구동형 쏘나타)는 미국 법인(HMA)과 현지 소비자들의 요구사항들을 철저히 반영하고, 승차감, 핸들링, 북미 호핑, 트레일러 장착 시험 등 북미 위주의 시험을 집중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보다 완벽한 차량개발을 위해서는 현지시험을 늘렸다. 하지만, 포니엑셀의 잦은 고장과 좋지 않은 품질에 의한 회사의 신뢰성 실추는 몇 년을 두고 노력을 해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비자에게 한 번 외면당한 상품의 재기가 이렇게 힘들고 오랜 기간이 걸릴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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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 기고는 포니엑셀을 마감하는 호이기에, X-카를 개발할 당시 정주영 회장의 지시 내용을 메모한 것이 있어서 소개를 한다.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대졸 관리자들을 질책하며 조직을 효율적으로 개선하라는 지적도 흥미롭다. 당시 정열을 쏟아서 키웠던 현대전자와 비교해서 질책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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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적으로 이 당시에 경기도 용인의 마북리에서는 파워트레인 연구소가 설립되어 독자 엔진 및 변속기 개발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포니엑셀 후속 모델인 X-2에는 우리가 개발한 알파엔진을 장착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알파엔진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미쓰비시의 오리온 엔진도 병행하여 탑재하는 것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1. 기술개발 부문의 해외 유능 인재를 잘 골라서 채용하라. 현대전자의 경우, 채용 결과를 보니까 반은 잘못되어 실패했다.

2. 신엔진 개발을 독자적으로 못 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이다. 현대전자의 경우, 2년 후에는 세계 첨단기업으로 변모할 것이다.

3. 엄청난 개발비가 들더라도 적절한 사람을 채용하여 가솔린 엔진을 반드시 개발하도록 하라. 현대전자의 경우 거액을 들여 9명의 해외 박사들을 채용했다.

4. 주저주저하는 것이 문제이지 용기와 결심만 하면 모든 것이 안 될 것이 없다.

5. 차가 잘 팔린다고 해서 미개 시절에서 벗어났다고 자만하지 말고, 일본의 경쟁차들과 비교하면서 꼼꼼하게 꾸준히 노력하라.

6. 사람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지도자에 달려있다. 우리나라 기능공들은 기능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서 중흥기에 있지만 대졸 지도층은 아주 게으르다. 대졸 관리직은 반성하라.

7. 안 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

8. X-카(포니엑셀) 미국 수출을 서너 달 앞당겨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

9.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부서 조직을 재정비하고 근본적인 개선을 이룰 수 있도록 하라.

10. 해결 방법은 언제나 있다. 정신을 집중하여 생각하면 아이디어도 나오고 기억력도 향상된다. 사람의 능력은 무한한데 남의 엔진을 보고도 못 만들어 내느냐? 세계에서 제일 좋은 측정기기를 사와서 측정해가면서 더 좋은 우리의 엔진을 만들어라.

11. 원가를 5~10% 줄여서 생산성을 향상시켜라.
12. 두발 상태를 단정히 하고 주변 환경정리도 잘하면 일도 효율적으로 잘된다.

이렇듯 정주영 회장은 우리가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또한 강력하게 드라이브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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