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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유럽과 미국 레이스 무대를 평정한 승부사 - 에머슨 피티팔디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5-11-30 10:15:27

본문

에머슨 피티팔디는 F1 그랑프리를 비롯해 인디500과 챔피언십 오토 레이싱 팀즈(CART) 등 3대 빅 레이스를 재패한 명드라이버로 F1의 천재 아이르톤 세나 이전에 브라질의 모터스포츠 영웅으로 떠받들어진 인물이다. 유럽과 미국을 넘나들며 최고 클래스의 경기를 모두 정복하기는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위업을 달성한 열정의 사나이 피티팔디의 레이서 탄생을 더듬어 본다.


에머슨은 5살 때 자전거 레이스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일찌감치 재목감임을 보여주었다. 유난히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이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에머슨만큼 여러 가지 스포츠 종목에서 뛰어난 재주를 보인 사람도 드물다. 그는 맨 먼저 브라질의 국가라고 불리는 축구를 시작해 꿈나무로 주목을 받았고, 요트 경기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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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중반에는 바이크에 마음을 빼앗겼다. 형 윌슨이 카트(KART)를 타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그의 미캐닉 노릇을 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바이크 레이스를 할 때 불필요한 부품을 제거해 스피드를 올리는 법 등을 스스로 익혔다. 하지만 아버지가 바이크를 타다 사고를 낸 이후 에머슨에게도 바이크 금지명령이 떨어졌다. 이 때문에 몰래 바이크 경기에 출전하기는 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그의 어머니는 빗자루를 들고 방안으로 쫓아 들어가 아들을 마구 팼다. 그의 나이 15세 때의 에피소드다.


1년 뒤 에머슨도 형의 뒤를 따라 카트로 방향을 돌렸다. 이 무렵 승용차를 몰게 되었고, 자동차경주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친구의 르노차를 빌려서 나간 첫 번째 레이스에서 에머슨은 충돌사고를 일으켜 차를 크게 부서뜨렸다. 스스로도 놀란 대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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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유럽으로 건너가 포뮬러 포드에 몸을 실었다. F3로 올라가 총 9승을 기록하며 1969년 챔피언을 차지했고, 70년에는 F2로 클래스를 올렸다. F2에서 뛰는 에머슨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국 로터스팀의 대표 콜린 채프먼이었다. 유력한 팀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로터스팀의 주전 드라이버로 스카우트되는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에머슨은 같은 해 영국 그랑프리에서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하지만 시작이 순탄치 않았다. 팀동료였던 요헨 린트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것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채프먼은 결승을 포기했고, 다음 경기인 캐나다 그랑프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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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열린 미국 그랑프리는 루키 에머슨 피티팔디의 날이었다. 그의 복귀전이면서 사실상의 데뷔전인 미국 경기에서 에머슨은 거침없는 달리기로 맨 먼저 피니시라인을 통과했다.


“콜린이 펄쩍 뛰면서 모자를 던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과 잡지에서 보았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나를 위해 그런 세레모니를 한 것이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에머슨은 첫 우승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듬해 에머슨은 사상 최연소인 25세에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따냈다. 브라질 드라이버로서는 첫 쾌거였다. 2년 후인 1974년 맥라렌으로 이적해 클레이 레가조니와 첨예한 대결 끝에 또다시 드라이버즈 우승컵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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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는 형 윌슨이 피티팔디팀을 만들자 주저 없이 그곳으로 옮겨갔다. 그의 결정에 많은 사람이 놀랐지만 에머슨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피티팔디팀은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기대했던 브라질로부터의 자금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에머슨도 1980년 F1 무대를 떠났다. 한창 나이인 34세 때였다.


하지만 에머슨의 드라이버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제2의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1989년에는 43세의 나이로 인디500 우승과 CART 종합 챔피언을 한꺼번에 차지해 녹슬지 않은 기량을 확인시켰다. 1996년 CART 미시간 경기가 그의 고별무대가 되었다. 경기 도중 사고를 겪고 나서 그 길로 은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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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옛날부터 지고는 못사는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최고가 아닌 것은 싫다.”


이 말은 곧 그의 인생철학이고 레이스철학이었다. 후회 없이 달렸고, 챔피언의 명예도 수차례 누린 그는 누가 뭐래도 가장 성공한 레이싱 드라이버의 한 명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그의 성공에 자극 받아 브라질 드라이버들이 적극적으로 CART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청출어람의 신화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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