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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보레 콜벳이 온다.-1.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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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2-04-30 06: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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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보레 콜벳이 온다.-1.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올 봄 쉐보레 콜벳이 한국시장에 온다. 2011년 쉐보레 브랜드의 런칭과 더불어 8개의 모델을 쏟아낸 한국GM이 이번에는 이그조틱 엔터테이너 스포츠카 콜벳으로 이미지 강화에 나선다. 언제나 강조하듯이 '자동차회사는 뉴 모델을 먹고 산다.' GM측에서는 뉴 모델이 아니지만 한국 GM에게는 새로운 컨셉의 모델이다. 그것도 한국시장의 유저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장르의 모델이다. 카마로와 함께 강한 아이덴티티를 전면에 내 세우는 콜벳은 그 성능에서도 유럽차를 능가하는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첫 번째로 쉐보레의 역사를 살펴 본다.

Chevrolet Corvette -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전후 미국 유일의 본격적인 스포츠카 쉐보레 콜벳도 MG의 경우와 같이 두 사람의 친구가 있다. 그것은 하리 얼(Harley Earl)과 조라 아쿠스 던토브(Zora Arkus Duntov)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던토브라고 하는 사람의 경력을 간단히 짚어보고자 한다.

던토브는 1909년 12월 25일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이름으로 슬라브계라고 생각되는데 레닌그라드대학을 졸업한 후 베를린의 샤로템부르크공학연구소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그 후 몇 개의 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다이믈러 벤츠사도 포함되어 있다. 제 2차대전이 시작된 즈음에는 (1939년 9월) 파리에서 일하기도 했었는데 프랑스가 점령됨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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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참전도 머지 않았기 때문에 기술자는 차출되었고 던토브도 군함용의 디젤엔진 메이커의 컨설턴트로서 일하게 되었다. 전후 그는 포드 V8엔진(SV타입)을 OHV로 개량하는 키트제작을 담당하기도 했고 또 일시 영국 아라드사에서 일하기도 했었다. 국제적인 경력을 쌓았던 것이다.

1953년 - 스타일리쉬한 콜벳 등장
1953년 1월 뉴욕의 워드루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GM의 ‘모토라마’라고 하는 전시회가 있었다. 던토브는 여기에서 GM의 ‘프로젝트 오펠’이라고 하는 한대의 하얀 오픈카에 주목했다. 그것은 당시 GM의 부사장으로 스타일링 센터의 책임을 맞고 있는 할리 얼의 디자인으로 된 유럽을 의식한 스포츠 타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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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토브는 그 차를 자세히 뜯어보고 그 평가와 개량해야 할 부분을 상세히 기록해 당시 쉐보레 부문의 치프 엔지니어 에드워드 콜(후에 GM사장)에게 우송했다. 콜은 던토브를 초빙해 그를 연구개발기사로서 쉐보레 부문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던토브의 아래에서 프로젝트 오펠은 새로운 개발이 진행되었고 53년 6월에 콜벳이라는 이름으로 시판이 시작되게 되었다. 콜벳이란 2차대전 중 선단호송으로 활약한 소형 군함의 명칭이다.


1953 쉐보레 콜벳 프로모션 영상

콜벳(후에 베트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었다.)는 당시 근육질적인 미국차에 비해 스타일링면에서는 뛰어난 것이었는데 성능적으로는 문제가 없지 않았다. 직렬 6기통 3,845cc 150마력 엔진에 2단 AT가 조합되었는데 0-97km/h 가속성능도 11초로 준족으로 당시 미국에서 인기가 높은 유럽의 스포츠카에는 미치지 못하고 로드홀딩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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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던토브는 ‘프로젝트 오펠’에도 참여한 ‘빌 미첼’과 이 콜벳의 개량에 전력을 경주했다. 하지만 콜벳은 1955년이 되자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까지 4,600대 밖에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즈음 최대의 라이벌인 포드에서 스포츠타입 선더버드가 데뷔하고 또 콜과 얼이 강력한 존속을 주장하기도 해 콜벳은 어렵사리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56년형의 콜벳은 던토브의 고심이 스며있었고 그 내용도 꽤 우수하게 발전이 되었고 핸들링도 향상되어 0-97km/h도 7.3초로 단축되었다. 특히 57년형에서는 당시 아직 희귀한 연료분사 시스템과 4단 MT도 추가해 0-97km/h는 5.7초로 더욱 향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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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스페이스 프레임 채용의 레인 타입, SS도 만들어(315ps분사엔진 탑재)던토브는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출장할 계획을 세웠으나 GM수뇌부는 흥미를 보이지 않아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SS는 미국 국내 레이스에서는 상당히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다.

60년대에 들어서자 다른 미국차와 같이 콜벳에도 V8엔진이 탑재되었고 보다 높은 동력성능을 발휘했는데 후륜의 리지드 액슬은 62년형까지 계속되었다. 품위있는 섀시 성능은 유럽의 본격적인 스포츠카와는 상당히 격차가 있었다.

1962년 - IRS로 진화한 스팅 레이
그런데 콜벳은 63년형부터 면모를 일신한 뉴 모델을 선 보였다. 그것이 61년 2월에 시카고모터쇼에 출품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스팅 레이(Sting Ray)를 생산타입으로 이행한 모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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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륜은 독립현가장치로 되고 엔진도 V8 5,354cc, 출력은 고성능형은 345ps/6,000rpm로 아주 강대해졌다. 하지만 연료분사는 금전적인 문제가 걸려있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 마력증대를 노리고 배기량을 증대시키는 것은 60년대 미국차의 정석이었다.

이 스팅 레이의 최고속도는 227km/h, 0-97km/h 5.9초로 초대의 그것을 거의 두 배 가량 단축시키고 있다.


1963 쉐보레 콜벳 스팅레이 tv 광고 영상

빌 미첼이라고 하는 남자는 물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답게 물고기에서 많은 힌트를 얻은 콜벳 샤크를 62년에 발표했다. 이것은 더욱 개량되어 65년 4월의 뉴욕 쇼에 마초 샤크 Ⅱ(Macho Shark Ⅱ)로 데뷔했다. 마초란 남성적이라는 의미이다. 이 모델은 아무래도 쇼카로서의 성격이 짙었지만 그 스타일링은 68년에 풀 체인지한 3대째의 콜벳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68년형에는 스팅 레이의 표시는 없었다. 하지만 69년형부터 이번에는 스팅 레이가 부활하게 되는데 미첼이 76년에 GM을 떠남과 동시에 그 엠블렘은 콜벳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스팅 레이는 미첼의 사랑이 담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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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벳은 유럽의 스포츠카와 비교해 보면 주행성, 거주성, 그리고 ‘풍격’면에서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다. 하지만 가격도 5천 달러(70년 당시)로 싼 편에 속해 미국에서의 인기는 아주 높아졌다. 그것은 석유파동(73년)에도 관계없이 팔려나갔고 77년에는 등장 이래 50만대째의 콜벳이 라인을 떠났다.

GM은 인기있는 모델의 모델체인지는 그다지 하지 않는다는 방침으로 68년형은 실질적으로 82년까지 바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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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이래 세계 최초로 유일하게 FRP(글래스 섬유강화 플라스틱)보디를 채용한 것도 미국차 풍토의 기질에 맞는 것으로 콜벳은 소위 ‘아메리칸 드림’의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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