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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 디자인의 나라 이탈리아 정신이 창조한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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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2-09-06 01: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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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가 2013년 1월 다시 한국시장에 진출한다. 2009년 크라이슬러 그룹의 자본을 인수해 경영권을 확보한 피아트가 이제는 그 시너지 효과를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 확대 전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한국시장에는 우선 신세대 피아트의 아이콘으로 내 세우고 있는 500(친퀘첸토)와 500C(캔버스톱), 그리고 중형 SUV 프리몬트를 수입 시판할 계획이다. 피아트 브랜드의 재 상륙을 계기로 이태리 토리노에 있는 피아트 본사를 찾아 피아트의 전반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우선 첫 번째로 피아트의 발자취에 대해 살펴 본다.

글 / 채영석 (글로벌오토뉴스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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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 브랜드는 1970년대 기아자동차의 전신인 기아산업이 피아트 124와 132를 라이센스 생산한 적이 있어 한국시장에서의 인지도는 높다. 1989년에는 금호그룹에서 수입해 크로마 등으로 존재감을 높였었고 이후 한보그룹이 인수했을 때는 크리스 뱅글이 디자인한 쿠페 피아트로 이탈리아 디자인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심어 주기도 했었다.

무릇 모든 제품은 그 지역의 환경과 문화의 산물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 유럽의 탈 것에 대한 사고방식은 우리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자동차를 부를 과시하거나 신분의 상징으로 먼저 받아 들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한다.

나라에 따라 추구하는 성격은 조금씩 다르다. 프랑스는 핸들링 우선의 차만들기를 하고 스웨덴은 유틸리티를 중시하며 영국은 품위를 우선한다. 이태리차들은 그 무엇보다 가속성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래서 굉음을 지르며 내달리는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같은 이그조틱 스포츠카가 이태리에서 태생하게 된 것이다. 그에 비해 피아트는 철저히 실용성을 중시하는 만인을 위한 차만들기를 한다. 같은 속도라도 이탈리아차는 가속성이 먼저다. 현대자동차가 디자인을 배웠던 쥬지아로의 이탈디자인이 공간에 대한 비중을 많이 둔 것처럼 피아트도 공간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한 메이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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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의 자동차산업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말에 생산을 시작했는데 그 발전은 비교적 늦어 60년대에 들어서부터 급성장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899년 피아트가 설립되었고 이후 1906년 란치아, 1910년에는 알파로메오가 설립되었다. 피아트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메이커로 된데 반해 알파로메오는 연간 생산규모 1,000대 이하로 1933년에는 국영 IRI(산업부흥회사)에 매수되기도 했었다.

초창기 발전속도가 늦었던 이태리 자동차산업은 2차 세계 대전 후 생산이 서서히 증가해 50년대 말부터 성장기에 들어서 생산은 60년에 64만 5천대, 65년에 117만 6천대로 확대, 73년에 피크로 195만 8천대에 달했다. 60년대는 피아트의 황금시대로 OM, 아우토비앙키, 란치아, 등을 흡수하고 페라리에도 출자했으며 또 해외진출에도 힘을 쏟아 동유럽, 소련에도 라이센스 생산권을 주고 부품공급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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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의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기후퇴의 여파로 생산, 판매가 모두 감소했다. 판매는 70년대 후반에는 73년의 수준을 넘을 정도까지 회복되었으나 생산은 70년대 후반에 160만대로 회복한 후 다시 감소, 80년대까지 140-150만대로 낮은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다각화를 중시한 피아트가 자동차부문에의 투자를 억제했기 때문에 승용차의 국제경쟁력이 떨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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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들어 피아트는 인원감축, 국외사업의 정리, 유럽 승용차산업의 기반강화, 유럽 타 메이커와의 제휴 등 자동차사업의 재건 정책을 폈다. 피아트의 재건의 전개와 국내경제의 회복에 이해 80년대 후반부터는 생산, 판매의 양면에 걸쳐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알파로메오는 부진이 계속되어 1987년에 피아트에 매수되었다. 그 해 람보르기니도 미국의 크라이슬러, 인도네시아의 세트코 그룹을 거쳐 1998년 7월 아우디에 매수되었다. 또 1998년에는 부가티도 VW에게 넘어갔다. 피아트는 러시아와 중 유럽, 동유럽 국가들에 다른 메이커들보다 앞서서 진출해 폴란드에서는 선두가 되기도 했었다. 국내에 수입될 친퀘첸토는 바로 그 폴란드의 공장에서 생산된다.

20세기 말 이탈리아의 경제성장이 하락세를 보이며 피아트의 존재감도 약화되었다. 1997년의 성장률은1.5%, 1998년은 1.4% 등으로 같은 기간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로권(유럽단일통화에 참가한 11개국)의 평균성장률이 2.6%였던데 대해 이탈리아의 평균성장률은 1.2%였고 또 1999의 경제성장률도 유로권 11개국 중 최하인 1.1% 수준이었다.

이탈리아의 경기침체가 고스란히 피아트의 업적에 반영된 것이다. 자동차사업부문의 1999년 상반기 업적은 남미의 수요저하, 유럽시장에서의 가격경쟁 심화, 피아트의 대표적 양산차종 푼토가 모델 말기에 이르른 점 등도 영향을 미쳐 2억 5,700만 유로의 영업손실을 내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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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피아트는 그들의 장기인 소형차에 집중해 개발도상국시장을 집중 공략했고 그 결과 크라이슬러를 인수할 수 있는 자금력을 확보할 수준으로 회복됐다. 세계 경기가 호황이었던 2006년에는 피아트의 이태리 내수시장 점유율이 30.7%로 크게 증가했고 상용차 시장도 11.5%나 늘기도 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브랜드 피아트

이탈리아의 자동차는 피아트로 대변된다. 그 피아트의 역사는 9인의 창설자 중의 리더였던 조반니 아넬리(Giovanni Agnelli)가문의 역사와 같다. 그만큼 조반니는 피아트를 거대한 산업왕국으로 키우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창의력과 박력이 투철했던 기업경영의 귀재인 조반니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피아트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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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럽 여러나라 중 이탈리아의 자동차공업이 가장 낙후되어있다는 것을 보고 정치가보다는 사업가가 될 결심을 한다. 시장직을 버리고 돈 많은 유지 8인을 모아 1988년 토리노에 자동차회사를 설립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피아트자동차다.

1888년에 피아트 1호차가 만들어졌다. 680cc의 배기량에 2기통 3.5마력의 엔진을 가진 이 차는 시속 35km로 달릴 수 있는 4인승차였으나 불행히도 후진은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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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의 자동차에 대한 생각은 확고했다. ‘자동차는 결코 부자들의 전용물이 되거나 레이스만을 위한 자동차여서는 안된다. 대중이 탈 수 있는 값싸고 성능이 좋은 자동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08년에는 4기통 1,800cc 12마력의 엔진을 탑재한 값싼 소형차 티포(Tipo)를 만들어 인기를 얻는다. 이 차는 휘발유 1리터로 10km까지 달릴 수 있는 경제적인 자동차로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으로까지 팔려가 택시로 환영받는다. 토리노의 피아트 박물관에는 그 차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세계 제 1차대전은 피아트가 급성장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다 준 전쟁이었다. 군용차, 비행기 등 군수산업으로 큰 이익을 얻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이 시설들은 그대로 이용할 수 있어 비로소 대형 자동차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는 티포 5라는 값싸고 성능이 우수한 소형차를 만들어 1919년에 선을 보였고 1926년까지 8만대나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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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 소형차의 명성은 1936년에 내놓은 2인승 티포 500, 일명 토포리노, 미키 마우스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4기통 570cc 배기량에 13마력의 엔진을 장착한 이 차는 3.2m의 길이에 1리터로 무려 18km를 주행할 수 있었으며 최고속도도 70km/h나 됐었다. 이 토포리노는 1948년 4인승으로 바뀐 뒤부터 1955년까지 무려 70만대나 생산해 이탈리아의 국민차로 뿌리를 내렸다.

피아트가 회사로서 정식으로 설립된 것은 1899년이고 회사의 정식명칭은 Fabbrica Italiana Automobile Torino이다. 첫 글자들만을 따서 FIAT가 된 것이다. 1906년에는 FIAT S.p.A.로 사명을 변경하고 주식법인이 된다. 승용차와 사용차 생산을 중심으로 철강, 경합금, 부품 생산의 각 분야로 확대해 1919년에는 종업원이 4만명에 이르렀고 1939년에는 6만명을 거느리는 대기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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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69년대 후반부터 국내의 다른 자동차메이커를 비롯해 부품 메이커, 원재료 연관 메이커 등을 다수 흡수하고 합병했으며 1967년에는 OM S.p.A.(상용차회사), 68년에는 오토비앙키 S.p.A.에 자본 참여하는 방식으로 자회사화했다. 그리고 1969년에는 고급차 메이커인 란치아와 페라리를 매수해 이탈리아 자동차생산의 90%를 점하게 되었다.

구조조정의 여파로 항공기 산업에서 손을 때는 아픔도

해외로의 진출도 일찍이 시작했다. 창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07년에 벌써 자동차생산의 라이센스 관련 부문을 담당하는 자회사 Austro-Fiat를 설립했고 이후 현지 자본에 라이센스를 공여하는 형식을 기본으로 진출해 나갔다. 2차 대전 전까지는 미국 기업에의 라이센스 공여( 1909년), 폴란드의 Polski-Fiat(1934년,현 FSO-FSM), 프랑스의 심카(Simca)에 라이센스를 공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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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스페인의 SEAT설립에 자본참가와 라이센스를 제공했으며 54년에는 아르헨티나, 62년에는 베네수엘라, 칠레, 73년에는 브라질 등 남미지역에 진출하기도 했다. 또 프랑스의 시트로엥과도 15%의 자본 참여를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확장하고자 하는 피아트의 노력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노사관계가 악화되어 많은 스트라이크가 발생했고 그 결과 생산성과 품질이 떨어지고 피아트차의 경쟁력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1973년에는 석유파동까지 겹쳐 생산대수도 그 해 168만대에서 1975년에는 123만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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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원유가격의 상승에 의해 공공 대량수송이 교통의 중요한 수단이었고 따라서 승용차산업의 비중이 떨어졌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다각화 방침을 내놓게 된다. 75년에 상용차전문 메이커인 IVECO를 네델란드에 설립했고 79년에는 Fiat를 지주회사로 하고 각 사업자회사가 담당사업을 통괄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이 다각화 정책으로 인해 자동차산업에의 투자는 억제되었고 승용차의 경쟁력은 떨어져 1980년에는 생산판매가 120만대 수준까지 떨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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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80년부터 84년까지 ‘경영재건 5개년 계획’을 수립해 회사 살리기 운동을 전개했다. 잘 나갈 때는 확장하다가 어려우면 구조조정을 하는 전형적인 패턴은 피아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내용은 우선 신형차 투입을 시작으로, 채산성 나쁜 기업의 정리, 다른 메이커와의 제휴, 자동화와 합리화의 촉진 등을 실시했다. 이 결과 만들어진 차가 1982년에 데뷔한 소형차 우노(Uno)로 피아트 사상 최대의 양산차로 자리를 굳혔다.또한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사업에서의 철수, SEAT에서의 자본철수, 부품 분야에서 푸조, 르노, 볼보 등과의 제휴, 사브와의 신형차 개발 제휴 등을 비롯해 로봇 도입에 의한 자동화를 진척시켰다.

노사관계도 80년의 스트라이크를 경영진이 무난하게 수습하면서 대폭 개선했다. 그 결과 1980년에 150만대였던 손익분기점이 84년에는 100만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85년에는 주요부품 모두가 흑자로 전환되었고 경영재건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이 힘을 바탕으로 86년에는 포드에 대항해 알파로메오 매수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이어서 또 다른 소형차 티포의 투입이 효과를 거두어 89년에는 유럽시장에서 독일의 폭스바겐에 이어 14.8%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이후로는 다시 떨어져 93년에는 폭스바겐, GM, 푸조그룹, 포드 등에 뒤지는 실적을 보였다. 이탈리아 시장에서도 폭스바겐과 포드 등의 공세에 밀려 90년 53%에 이르던 것을 마지막으로 과반수 아래의 수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룹 전체의 실적은 판매부진과 많은 연구개발비 투자, 합리화 비용 등에 의해 1993년에는 81년의 결산발표 개시 이래 최초로 적자를 기록했다. 그룹의 중심사업인 자동차부문이 모델체인지의 지연과 유럽 경기의 후퇴 등으로 판매가 부진해 적자로 전락한 큰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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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는 1992년에 투입한 친퀘첸토, 1993년의 푼토 이외의 모델이 없어 신 모델개발이 급선무인 상태였다. 그래서 93년에 피아트의 ‘쿠페 피아트’, 란치아의 델타 등이 출시되었고 이후 2000년까지 모두 18개의 신형 모델을 발표할 계획을 내놓았었다. 그 첫 작품이 ‘브라보와 브라바’라는 소형차였다. 1995년 등장한 브라보와 브라바는 미니카에 강한 피아트의 면모를 여실히 입증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앞으로 유럽시장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태풍은 피해갈 수 없었다. 1992년 자동차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조직을 개편했다. 93년에는 유통부문의 회사를 매각했고 작년에는 Commpes그룹 내의 우주항공, 에너지, 방위관련사업을 피아트그룹에서 분리해 통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항공기사업에서 손을 땐 것도 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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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피아트 박물관 2층에는 그들이 개발하고 생산했던 다양한 형태의 항공기들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사실 항공기와 선박, 자동차등은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피아트의 항공기도 전쟁을 통해 발전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발전하기 시작한 항공기 산업에서 이태리가 밀려난 것은 규모의 경제라는 틀을 극복하지 못한 피아트의 책임이 크다. 그것은 이태리의 대부분의 산업이 중소기업에 패밀리 비즈니스 중심이라는 환경의 산물일 수도 있다. 피아트는 이 외에도 선박 엔진, 자전거, 냉장고, 세탁기까지 생산한 역사를 갖고 있다.

한편 해외사업에서는 구 소련을 중심으로 동구지역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1993년 가을에는 폴란드의 FSM을 인수해 피아트 폴란드로 사명을 바꾸었다. 이 회사의 93년 생산실적은 26만대에 달했다. 94년부터는 이 공장에서 피아트가 아이콘으로 내 세우고 있는 친퀘첸토와 우노의 생산도 개시했고 부품생산도 착수했다. 그리고 푸조그룹과 합작으로 미니밴 생산도 했다.

21세기 들어서는 GM과의 자본제휴를 해소하면서 자본에 숨통이 트이며 힘을 얻기도 한 과정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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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자동차회사들의 역사를 보면 성장기에는 문어발식의 확장을 거듭했다가 어려울 때는 과감히 정리하는 구조조정의 반복이 계속되는 것을 할 수 있다. 우여 곡절 끝에 2004년 중반 서지오 마르치오네(Sergio Marchione)가 피아트그룹의 CEO로 취임했고 2005년부터는 피아트 오토의 CEO도 겸무하면서 피아트는 안정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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