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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 150주년을 통해 본 제조업에 관한 몇 가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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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3-08-03 01: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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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생산기법을 자동차 제조에 도입한 헨드 포드가 2013년 7월 30일부로 탄생 150주년을 맞이했다. 헨리 포드는 1863년 7월 30일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났다. 1903년 포드자동차를 설립했다. 1913년에는 오늘날 자동차 생산의 기초가 된 조립 라인에 의한 대량 생산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포드자동차가 1908년 출시한 모델 T는 1574만대가 판매된 전무 후무한 모델이다. 헨리 포드를 비롯해 미국 자동차의 산업사를 간략하게 짚어 보며 21세기에 무엇을 생각해야 할 지 고민해 보자.

글 / 채영석 (글로벌오토뉴스국장)

1947년 헨드 포드는 8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고향 미시간주 디어본에 포드자동차의 본사가 있다.

헨리 포드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포드자동차는 세계적인 규모의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 디어본 본사 빌딩에는 미시간주에서 기증한 '헨드 포드 데이'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또한 미국 전역에 걸친 이벤트의 개최를 알리기도 했다. 아시아 태평양, 유럽, 남미에서도 이벤트를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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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의 손자 빌 포드는 고객이 원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제품의 개발을 가속화 하고 고용도 확대하겠다며 세계의 모빌리티에 자유를 지속적으로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헨리 포드는 분명 자동차 산업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대량 생산(Mass Production) 기법을 자동차산업에 도입해 자동차 대중화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대량 생산 기법은 아담 스미스 때부터 있었다. 포드는 도살장에서 힌트를 얻어 컨베이어를 통해 차대가 흘러가고 분업을 통해 조립을 하는 아이디어를 창안한 것이다. 그 때까지 모델 한 대 생산에 걸리는 시간을 12시간에서 1시간으로 단축시키는 혁명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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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는 1908년 T형 포드(Model T)를 출시해 1927년 단종할 때까지 모델체인지를 하지 않고 1,574만대를 판매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투자를 많이 하지 않고 소품종을 다량으로 생산해 수익성을 높였다. 그로 인해 자동차 판매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출시 당시 2,000달러였던 T형 포드의 시판 가격이 1925년에는 260달러까지 떨어졌다.

거의 1/10 수준으로 떨어진 자동차 가격으로 인해 그때까지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자동차가 대중의 발이 됐다. 중산층 들도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됐고 그것은 결국 자동차의 수요 촉발로 이어졌다. 그것이 모터리제이션(Motorization)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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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라면 헨리 포드는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대량생산 기법은 기업주에게는 혁명이었지만 당시의 공장 노동자에게는 형별에 가까운 것이었다. 단순 반복 노동이 끼치는 패혜가 심각했던 것이다. 오늘날에야 노동자들의 자세를 좀 더 편하게 해 '근 골격 질환' 등 직업병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강구되고 있다. 더불어 자동화의 발달로 근로자들 완력에 의지 하지 않고도 돌아가는 시스템이 도입되어 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사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자동차 공장의 이직률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포드의 한 공장에는 연간 소요 인원이 14,000여명이었으나 한 해에 7만명을 새로 고용해야 했다. 노동자들이 생소한 생산 현장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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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헨리 포드는 다시 한 번 혁명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그 때까지 하루 12시간 일하고 2.34달러를 지급했던 급료를 8시간에 5달러로 인상한 것이다. 당연히 동종업계로부터 거센 반발에 부딛혔지만 그는 밀어 붙였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디트로이트 인근은 물론이고 카나다에서까지 포드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몰려 들었다.

공장 노동자들의 이직률은 당연히 떨어졌고 그들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갔다. 더불어 수입도 늘었고 저축도 가능해졌다. 당연히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자동차회사들은 생산 시설을 확충했다. 그를 위해 인원을 보충한 것은 당연지사. 이런 선순환의 반복이 자동차산업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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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는 철도나 선박보다는 자동차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게 하는 로비에 성공했고 미국의 자동차산업은 날개를 달았다. 여기에 1921년에 세계 최초로 자동차 할부금융이 도입되면서 자동차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기에 접어 들었다.

1918년 미국 자동차 생산의 50%가 포드사 제품이었을 정도로 포드의 대량생산 기법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포드주의(Fordism)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다. 포드는 높은 임금을 받고 게으름을 피우는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전직 권투선수와 레슬링 선수들을 고용해 감시조를 만들었다. 생산성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에 포드자동차 공장에서는 1941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노조가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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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헨리 포드에서 시작된 대량 생산 기법을 바탕으로 자동차를 산업화한 것은 윌리엄 듀란트와 알프레드 슬론, 루이 쉐보레 등이 이끄는 GM이었다. 이들은 주기적 모델체인지를 비롯해 다양한 배기량과 차별화되 브랜드 전략 등을 도입해 소비자들을 끌어 들였다. 그 결과 1950년에는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기는 했지만 전 세계 자동차 생산의 81.5%가 미국산 제품이었다.

1954년에는 미국시장 54%가 GM 제품이었다. 이는 1938년 루즈벨트 대통령이 남북 각각 세계의 고속도로 9만 Km를 건설한 것도 미국 자동차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로 인해 인구 5만명 이상 도시가 이 고속도로망과 연결되게 되었다.

적어도 1960년에서 1970년대까지 GM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를 지배했었다. 그래서 GM의 CEO를 13년이나 역임하고 후에 국방장관이 된 찰리 윌슨은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 좋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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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GM은 그러나 본업보다는 레이건 대통령의 금융 우선 정책에 현혹되어 GMAC라는 금융회사를 설립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금융 우선 정책은 미국 제조업 종사자 1,500만명의 일자리를 앗아갔다. 마가렛 대처 수상도 금융 우위의 정책으로 영국의 제조업 종사자를 800만명에서 300만명 수준으로 떨어 트렸다. 영국의 로버는 도산했고 미국의 GM과 포드도 파산보호신청까지 들어갔다가 국가의 돈으로 가까스로 회생했다.

진정한 디트로이트 맨 밥 러츠(Robert Lutz)의 말대로 자동차산업은 '돈 놓고 돈 먹기' 산업이 아니다. 서비스업과 제조업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고 일갈하고 있다. 최근 해외의 핵심 기술을 천문학적인 로열티를 주고 사서 중국에서 제품을 생산해 판매하는 삼성전자가 과연 한국 경제에 얼마나 기여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20세기와 다른 경제 환경 때문이다. 중국에서 생산해 판매되는 삼성전자의 제품은 중국의 수출품이고 중국의 GDP로 계산된다. 고용창출도 중국에서 하고 세금도 중국에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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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기업주를 중심으로 그것을 찬양하는 정치인과 일부 미디어들에게는 찬양의 대상일 수 있다. 밀턴 프리드먼은 CEO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주주 이익의 극대화라고 했었다. 그 기준에는 좋을 수 있다. 하지만 필립 코틀러가 말하는 21세기 착한 기업(Good Company)의 기준에는 들지 못한다. 기업에 대한 시각이 크게 달라졌는데 국내 현실은 그와는 괴리가 커 보이는 현상들이 더 강조되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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