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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고유 모델, 포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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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9-06-19 17: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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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3년간의 현장경험을 한 뒤에 서울 본사로 발령받아서 근무하고 있던 어느 날, 포니 프로젝트 의 기획 팀장에게 당시 본사가 위치했던 세운상가 옥상으로 불려 올라갔다. 현대자동차의 첫 번째 고유 모델 프로젝트 팀에 참여하자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글 / 이충구 (前현대자동차 사장, 한국자동차공학회 전회장)
출처 / 한국자동차공학회 오토저널


1972년~1973년경 현대자동차 내부에서는 고유 모델이라는 말이 등장했고, 우리나라 국민의 성격이 그렇듯이 결정하면 속전속결로 해야만 했다. 당시 정주영회장과 정세영 사장은 Ford는 물론 GM과의 가능성도 타진해 보았다. 하지만 세계 최대 자동차회사인 GM은 이미 1972년 신진공업사와 50 대 50 합작으로 GM코리아라는 회사를 설립해 놓아 손을 잡고 있었다. Ford와 협력에서는 경영권에 관한 합의를 하지 못한 현대자동차의 입장은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 르노와도 접촉했었으나 생각이 서로 달라서 결렬되었다. 르노와의 협상은 상당히 진척이 되어 검토용 레이아웃 도면까지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세계굴지 회사 들과의 결렬이‘우리 고유모델’을 만들게 된 강한 동기부여가 된 셈이다. 내수시장의 규모가 너무 작아 수출까지 가능한 우리 고유의 모델을 만들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정주영 회장의 결단을 재촉한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고유 모델을 개발한다는 결정은 안팎으로 거센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현대가 포드 모델을 들여다 조립은 하고 있었지만, 세계 자동차 산업 전문가들이 밖에서 보기에는 한국의 인프라구축상태가 국제적인 산업수준과 비교해서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었다. 고유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지 모르는 기술자들에게는 엄두가 안 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하면서 국가적으로는 1980년대 자동차공업의 기본 방향과 목표를‘완전 국산자동차 생산 및 수출기반 확립’이라고 잡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정주영 회장이 평소 가까운 친분관계를 갖고 있던 미스비시의 구보 회장과 기본적인 양해 각서를 받아 오면서 급진전이 이루어 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역시도 간단한 과정은 아니었으리라 짐작이 간다.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이 양해 각서로 시작된 미스비시와의 협력관계가 한국의 자동차 기술 산업을 키워서, 일본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부메랑 효과를 그때 이미 걱정하고 있었다. 중대한 결심을 한 구보 회장은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한국에 대해서 특별한 인연과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양 그룹 회장의 각서 내용은 메모 수준의 최대한 협력한다는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이것은 고유 모델을 시작하는 초석이 된 셈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Lancer’라는 미스비시 소형차 새시 위에 차체만 우리 고유 모델로 개발하는 프로젝트가 시작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미스비시로부터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포함한 새시 전체 플랫폼 기술을 공여 받는 기술제휴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시 어느 부분까지 기술을 받는 것인지는 확정이 안 된 상태였다. 실물제공과 함께 기술 제휴의 범위나 내용은 구체적으로 협의가 진행되었다.

동시에 미스비시 측으로부터 Lancer 새시 2대를 제공 받아 우선 이탈리아로 보내졌다. 이듬해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하기 위한 포니와 포니쿠페의 새시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실물 샘플을 보고 설계도를 완성하는 리버스 엔지니어링 방식을 취했다. 내가 제일 처음 시작한 부품은 브레이크 시스템에 속해 있는 부품의 설계였었다. 실물을 보고 설계를 하는 것이다. 대학 때 배운 공업제도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초보단계의 브레이크 드럼의 제도를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설계라기보다는 제도 실습 수준의 시도였고, 그때의 습작은 휴지화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부품 도면들을 우리가 직접 제도를 해서 출도 해야 자동차가 개발 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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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고유모델을 독자적으로 개발한다는 발상은 그 당시 생각해 보면 앞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도전임에 틀림없었다. 최고의 결정권자가 무모하기 때문에 가능 한 것이었을까? GM의 톱이 절대 성공 못할 것이라던 그 말이 수긍이 간다. 얼마 전에 방영했던‘베토벤 바이러스’드라마에 나오는 마에스트로와 급조된 단원들의 첫 모임이 생각난다. 국가의 간절한 요구와 함께 거기에 부응할 뿐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추진하기로 결정했던 당시 정주영 회장의 결심은 오늘의 한국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 기술자들의 마에스트로였다.

일천의 경험도 없는 미숙하기 그지없는 단원들을 이끌고 그것을 수행하기로 결행한 정세영 사장도 도전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주영 회장이 즐겨 사용하던‘니가 해봤어?’가 아이러니하게도 되새겨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안 해본 사람만이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엄청난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만약에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어떤 방향으로 가 있을까? 캐나다나 호주의 정도 위치에서 머뭇거리고 있을까? 아니면 미국의 Big 3중 1개 회사에 운명을 맡기고, 그들과 같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말레시아나 인도네시아처럼 아직도 방향을 못 잡고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기간 산업구조나 기술사적으로도 엄청나게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도요타와 제휴관계에 있던 신진자동차가 역사나 규모 면에서 월등히 앞서 있었다. 신진자동차는 1954년에 하동환공업사와 함께 신진공업사로 발족했었다. 1960년대 들어 5.16 군사정부의 강력한 경제정책에 힘입어 1962년 4월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이발표되고 자동차보험법이 제정되면서 국내 최초로 대규모 자동차 조립 공장인 새나라자동차(년 생산능력 6,000대)가 설립되어 같은 해 일본 니산의 블루버드 승
용차의 SKD 방식으로 수입하여 조립하여 생산한 최초의 국내 생산 승용차가 탄생하였다. 1965년 새나라 자동차를 인수한 신진공업사는 1966년 상호를 신진자동차로 바꾸고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로 국산화율 20% 수준의‘코로나’와‘퍼블리카’를 생산하고 있다가, 1972년 다시 GM코리아라는 회사를 설립해 놓고 있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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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안 보이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포니 고유모델 개발 프로젝트는 시작되었고, 필자는 정주화 차장이 이끄는 프로젝트 기술 팀에 참여하게 되었다. 프로젝트 총괄은 정세영 사장이 직접 진두 지휘하고 신현동 이사, 이수천 이사, 이양섭 이사 등 중역진들이 참모 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필자는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했고, 첫 번째 작업으로 파트 넘버링 시스템의 구축을 시작했다. 우선은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도요타, GM 그리고 포드 파트 넘버링시스템을 참조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우리만의 고유 파트 넘버링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지금도 그때 만들어 낸 파트 넘버링 시스템을 그대로 수정함이 없이 또 큰 불편 없이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그 망망 대해를 향해
정세영 사장은 이탈디자인(Ital Design), 피닌파리나(Pininfarina), 베르토네(Bertone), 기아(Ghia), 롬바르디(Lombardi), 미켈로티(Michelotti) 등 6개의 쟁쟁한
이탈리아 카로체리아들 중에서 이탈디자인(Ital Design)사를 포함한 3개의 업체를 직접 방문해서 이탈디자인의 주지아로를 선택했다. 이탈디자인사는 1968년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가 알도 만토바니(Aldo Mantovani)와 함께 설립한 회사다. 알파로메오(Alfa Romeo)의 알파수드(Alfasud)를 비롯해 폭스바겐의 골프(Golf)외에도 일본 이스즈의 피아자등 을 당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주지아로가 이끄는 카로
체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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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디자인은 미케로티가 요구한 용역비 70만 달러보다 50만 달러가 많은 120만 달러를 원했지만, 주지아로의 성공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 1973년 9월에 주지아로가 직접 서울로 3개의 포니의 스타일링 랜더링(Rendering) 안을 가지고 왔다. 당시 한국인에게는 낯선 패스트백(Fast Back) 스타일의 디자인을 최신 유행이라고 적극 추천해서 서울 세운상가 본사에서‘A’안을 선택하게 되었다. 주지아로는 그 자리에서 골프와 시로코, 아우디 80 등의 모델들을 보여 주며 최신 디자인의 경향을 설명해 주었다. 후에 유럽에 가보니 이미 VW 골프, 르노5, 피아트127 등 해치백스타일의 자동차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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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탈디자인을 이끄는 조로제토 주지아로와 스타일링을 포함한 설계, 프로토타입(Prototype) 제작 등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해서 새시를 포함한 플랫폼은 미스비시‘랜서’를 사용하고, 차체 디자인은 이탈디자인에 의뢰해 우리 고유의 모델을 만들어 낸다는 큰 틀이 짜였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직원 10여명이 그들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디자인과 설계과정을 배울 수 있도록 파견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때 처음부터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준 미야카와(Miyakawa)라는 자동차 관련 이탈리아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한 일본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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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진행을 위해 기술팀들이 이탈리아로 가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정세영 사장은 당시 PE (Product Engineering : 설계부서를 이렇게 불렀다.) 부서의 팀장이었던 정 차장을 설계책임자로 임명했다. 정 차장을 팀장으로 해서 필자를 포함한 연수팀이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다. 정 차장이 1973년 10월에 출발했고, 이어서 김동우 대리가 2진으로 1974년 1월 12일에 출발했다. 곧 이어 박광남 과장과 필자가 2진으로 현지에 도착 합류했고, 곧 이어서 이승복 과장이 합류하였다. 이렇게 5명이 이탈리아 토리노 그룰리아스코라는 한적한 교외의 아파트에서 1년간 자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한국에 아파트 문화가 막 도입되던 시절이어서 방 2개밖에 없는 아파트였지만, 매우 낯설고 좁았지만 새로운 문화(?) 생활이었다. 몇개월 뒤에 이승복 과장이 생산기술 담당으로 귀국하고 허명래 대리가 파견 팀에 합류하면서 5명은 유지된 셈이다.

함께 타고 다니던 자동차는‘피아트 124’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의‘피아트 127’이라는 2 Door Hatchback 세단이었다, 팀원 중에 운전면허 소지자는 정 차장과 필자 뿐이었다. 게다가 허 대리가 합류하기 전까지는 필자가 제일 막내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다양 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세탁은 각자가 해결해야 했고, 자취 생활의 식사준비나 설거지는 2명씩 돌아 가면서 당번을 정해서 준비했고, 식사 메뉴결정은 물론 그날
당번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했다. 아파트 생활소모품이나 음식준비물 시장 보는 일은 막내의 임무였다. 퇴근길에 빵 가게에 들려서, 막 구워낸 따끈따끈한 이탈리아 빵을 조금씩 뜯어 먹으면서 먼 이국 땅의 서러움을 잊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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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974년 2월3일 필자가 이탈리아에 도착하면 서부터 본격적인 포니 개발업무가 시작되었다. 10 개월 후인 그 해 말에는 설계업무가 완료 되는 것으로 계획 되어 있었다. 설계착수와 동시에 그 해 10월 말에 개최되는 55회 토리노 국제 모터쇼에 1호 차를 출품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니 1대 뿐만 아니라, 포니 쿠페 1대까지 2대를 프로토 타입으로 만들어서 8개월만에 모터쇼에 출품한다는 엄청난 계획이었다. 모터쇼에 출품할 프로토 타입용 부품들이 이미 2~3 개월전부터 기획되어서 이탈디자인사 내부에서는 물론이고 손재주가 뛰어난 조그만 카로제리아 하청업체들에서 제작되어 가고 있었다.

금형 제작에 기준이 되는 마스터 모델이 토리노의 어느 한 구석에서 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3개월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실차 사이즈의 도면을 그리기 위한 백지(마일러 페이퍼) 들을 제도실 내에 펼쳐 지고 여러 사람들이 그려가고 있었다. 병행해서 모터쇼용 2 대의 자동차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이탈리아 작업자들의 우수한 재능에 감탄하곤 했다. 우리는 하나라도 더 배워야 만 했다. 우리는 저녁시간에 모여 그 날 배운 것을 정리하고 내일의 할 일을 분담했다. 다섯 명이 업무를 나누어서 파악해 가면서 진행과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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