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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 누볼라리, 멕라렌. 전설이 된 레이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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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9-07-08 17: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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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에서의 승리를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일까. 당대 최고의 기술력이 동원되어 탄생한 머신의 성능도 중요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그 머신을 컨트롤하는 것은 한명의 드라이버이다. 물론 수많은 엔지니어들과 개발자들에 의해 수년의 테스트를 거쳐 트랙에 서게 되고 또 정비사들의 신속하고 정확한 정비없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머신과 드라이버의 조화가 레이스의 승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1887년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자동차레이스가 열린 이래 수 많은 레이서들이 승리의 영광과 패배의 아픔을 겪어왔다. 그리고, 이번 지면에서는 이 오랜 역사의 자동차경기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3명의 레이서를 소개한다. 시간을 거슬러 이젠 전설이자 신화가 된 3명의 레이서들을 만나보자.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기자)

영원한 F1의 영웅. 아이르톤 세나
30943_2.jpg아이르톤 세나(1960~1994,브라질)는 1960년 3월 20일 상파울로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이, 밑으로 남동생 하나가 있었다. 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그에게 고카트(go-kart)를 만들어 선물했고,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어린 소년은 고카트를 타고 자기 집 목장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닌 것은 물론, 트랙터를 비롯한 농장 내 운전 가능한 모든 것을 운전하게 되었다.

1973년 열세 살 소년 세나는 상파울로 인터라고스(Interlagos) 써킷에서 레이싱 카트 시리즈 참가를 시작으로 1977-78년 남미 카트 챔피언 2연패, 1978-81년 브라질 카트 챔피언 등 화려한 전적을 쌓았다.

1981년 세나는 포뮬러 포드 1600 제작 업체 중 가장 뛰어난 곳 중 하나로 영국 노포크(Norfolk)에 있는 반 디멘 공장에서 짐 러셀 레이싱 스쿨의 정비사였던 랠프 퍼맨(Ralph Firman)을 만나 레이싱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 해 3월 그는 반 디멘 RF81을 타고 우승을 따냈고, 영국 포뮬러 포드 부문의 양대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2년 말에는 트럭스턴(Thruxton) F3 비선수권 부분에 출전해 가볍게 폴 투 윈으로 레이스를 마쳤다.
1983년에는 F1 진출을 염두에 두고 F3 전영국 챔피언십 시리즈에 출전하여 9 경기를 내리 이기는 기염을 토하며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는 분명 F1으로 가는 길의 선두에 있었다. 시즌 중 윌리엄즈(Williams)와 맥라렌 (McLaren)에 의해 F1 테스트를 거쳤고, 톨맨-하트(Toleman-Hart) 팀에 입단한다. 이제 그랑프리 무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91년 역시 세나의 해였다. 개선된 혼다 V12 엔진을 얹은 맥라렌-혼다 MP4/6 머신을 타고 개막전부터 내리 4승을 챙겼다. 4승 모두 폴 투 윈 이었다. 시즌 7승으로 챔프 타이틀은 그의 것이었다. 이로써 세나는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3회나 차지하는 대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1994년 5월 1일 일요일 산마리노 이몰라 그랑프리. 당시 34세였던 브라질의 영웅 아이르톤 세나는 윌리엄즈-르노 머신을 몰고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피트 지역 바로 뒤쪽의 탐부렐로(Tamburello) 좌코너를 시속 306km의 속도로 진입하던 그는 컨트롤을 잃고 18m를 날아가 콘크리트 벽에 충돌하고 말았다. 충돌 당시 속도는 시속 217km. 충격으로 오른쪽 앞바퀴가 분리된 머신은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리며 트랙 가장자리까지 퉁겨져 나갔다. 즉시 적기가 발령되고 레이스는 중단되었다.

그는 즉시 헬기 편으로 볼로냐의 마지오르(Bologna's Maggior)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리고, 저녁 6시 40분, 그의 죽음이 공표되었다. 아이르톤 세나...영웅의 죽음이었다. F1 그랑프리는 리더를 잃었다. 사고 다음날 브라질 국기에 덮인 관이 검은색 벤츠에 실려 볼로냐 공항을 향했다. 수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세나는 영원히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전설의 레이서. 타지오 누볼라리
30943_5.jpg타지오 누볼라리는 1892년 11월 16일, 이탈리아 중북부 만토바시 근교의 카스테르 다리오에서 태어났다. 1920년에 모터사이클 경주에서 본격적인 레이스 활동을 시작해 그 후 30년간 레이싱 트랙에서 그의 일생을 보냈다. 레이스를 시작한 나이는 결코 적지 않으나 모터스포츠에 대한 정렬은 남달라, 지금까지 '챔피언 중의 챔피언'으로 불린다. 모터사이클 레이서로서 타지오는 모터사이클 레이스 353번 출전, 그랑프리 레이스 124번 참가로 105번의 우승, 1924년과 1926년 모터사이클 이탈리안 챔피언이 되었다.

한편 자동차경주에서는 1935년, 36년 이탈리안 레이스 챔피언을 획득하고 1935년 독일 그랑프리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세였던 메르세데스와 아우토우니온을 100마력이나 열세였던 알파 로메오 P3으로 최종 랩에서 역전승을 거둬 당시 독일 총독 아돌프 히틀러를 대신해 참가한 장교가 무척 화를 냈었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같은 해 6월 15일에는 알파 로메오 비모토레(bimotore)로 이태리 피렌체의 모터웨이에서 0~1km를 믿기 힘든 속도인 321.425km/h에 0~1마일을 323.175mile/h로 달려 2가지 신기록을 수립했다. 또한 밀레밀리아 대회에서는 뒤쫓아오는 자동차를 따돌리려 헤드 램프를 끄고 달리는 등 수 많은 명승부를 창조해 내기도 했다.

'최고의 대담한 레이서이자, 최초의 근대 레이싱 드라이버' 로 칭송되며 4륜 드리프트 주행을 실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1953년 9월 11일, 타계했을 때에는 61세의 나이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당시 레이서로서는 드물게 경기장에서 생명을 잃지 않은 '불멸의 명마(名馬)'로 불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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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오 누볼라리가 그의 생애 동안 우승한 전설적인 레이스에는 밀레밀리아, 타르가 플로리오, 이탈리아 그랑프리, 모나코 그랑프리, 프랑스 그랑프리, 독일 그랑프리, 투어리스트 트로피, 바르셀로나 그랑프리, 부다페스트 그랑프리, 르망 24시간 등을 들 수 있으며, 페라리의 창시자 엔초 페라리는 자신의 레이싱 팀의 드라이버를 뽑을 때 이 타지오 누볼라리를 기본으로 염두에 두고 선택했다고 한다.

타지오는 전세계 모터스포츠 팬들을 흥분시키고 열광하게 했으며, 그로 인해 사랑받는 드라이버였다.



맥라렌 웨이(McLaren Way), 브루스 맥라렌
레이서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브루스 맥라렌은 뉴질랜드 오클랜드(Auckland, New Zealand)에서 정비사이자 레이서였던 필 맥라렌(Phil McLaren)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워낙 자동차 경주에 열정적이었던 만큼 브루스도 자연스럽게 자동차 경주에 관심을 쏟게 되었고, 드디어 1952년 아버지가 사 준 1929년형 오스틴 세븐(Austin Seven)으로 처음 레이싱을 시작했다. 이 때만 해도 그가 몇 년 후 F1을 휩쓸 인물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1955년 오스틴 세븐을 팔고 오스틴 힐리 100(Austin Healey 100)을 구입하여 1956년 뉴질랜드 그랑프리에 정식으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 원래는 아버지가 경주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몸이 아파 경주를 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 대신 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는 기술적 결함에 의한 리타이어였으나, 맥라렌은 이렇게 레이서로서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30943_3.jpg그가 본격적으로 레이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당시 뉴질랜드의 영웅이자 맥라렌 자신의 영웅이기도 했던 잭 브라밤(Jack Brabham)의 머신인 1.5리터 쿠퍼(Cooper)를 구입한 이후였다. 1958년 쿠퍼 머신으로 뉴질랜드 그랑프리에 참가한 맥라렌은 맨 뒤에서 출발해 하나 둘 앞차들을 추월한 끝에 우승을 차지하는 극적인 플레이를 보여 관객들을 매료시켰고, 이 경주에서 뉴질랜드 그랑프리 협회 관계자들에 의해 '유럽으로 진출시킬 드라이버(Driver to Europe)'로 선정되어 드디어 F1의 성지라 불리는 유럽으로 가게 되었다.

쿠퍼팀에서 잭 브라밤과 함께 활동하던 맥라렌은 유럽으로 건너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1959년 12월12일 미국 세브링(Sebring)에서 열린 미국 그랑프리에서 22세의 나이로 우승함으로써 'F1 최연소 우승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고, 팀 동료인 잭 브라밤은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 196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서 열린 아르헨티나 그랑프리 우승, 모나코, 벨기에, 포르투갈 그랑프리 2위 등 좋은 성적을 이어 갔다. 그러나 1962년 모나코 그랑프리 우승과 그 해 챔피언십 3위를 차지한 것을 기점으로 이후 5년 동안 쿠퍼팀과 맥라렌은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침체기에 빠져 들었다.

1963년 맥라렌은 다음 시즌 개최되는 뉴질랜드 타즈만 챔피언십(Tasman/New Zealand)에 참가할 것을 쿠퍼팀에 제의했으나 거절당하자, 스스로 팀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타즈만 챔피언십에서 스스로 팀을 만들어 출전하는 것에 자신감을 얻고 유럽으로 돌아온 맥라렌은 이후 맥라렌팀의 상징이 된 '오렌지색' 제렉스-스페셜(Zerex Special)과 M1A 등의 머신을 직접 제작하며 독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결국 맥라렌은 1965년 8년 동안 몸 담아 왔던 쿠퍼팀을 떠났고, F1의 새로운 장을 열 맥라렌팀(McLaren Team)이 출범하였다.

맥라렌팀은 초기에는 별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967년 CanAm 시리즈(Canadian American Challenge Cup)에서부터 맥라렌과 데니 흄(Denny Hulme)이 우승을 휩쓸기 시작했다. 1967년 6번의 경주에서 흄이 3번, 맥라렌이 2번 우승하여 맥라렌팀은 그 해 챔피언이 되었고, 1969년에는 11번 연속 우승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9년간 계속된 CanAm 시리즈는 거의 맥라렌과 흄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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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이후 맥라렌의 역할은 드라이버에서 엔지니어, 팀 감독으로 더욱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드라이버로서의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이 팀 내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는 드라이버로서의 역할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 채 엔지니어와 팀 감독을 병행하다 1970년 7월 2일 새로 만든 M8D 머신을 테스트하던 중 사고로 사망하였다.

팀에 대한 그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던 만큼 충격도 컸다. 그러나 동료들은 끝까지 맥라렌팀에 남아 머신 개발을 계속했고, 그 때까지 쌓아 온 명성 덕분에 후원자도 많이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 데니 흄이 맥라렌 사망 후 처음으로 F1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부활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74년에는 말보로(Malboro)와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고, 데니 흄 외에 드라이버로 에머슨 피티팔디(Emerson Fittipaldi)를 영입해 처음으로 월드 챔피언을 배출하였다. 이후 제임스 헌트(James Hunt)가 다시 월드 챔피언에 오르며 맥라렌 사후 6년 만에 가장 막강한 F1 팀의 하나로 성장했다.

그러나 1977년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맥라렌팀은 다시 한 번 침체기에 빠져 들었다가 론 데니스(Ron Dennis)가 팀을 인수한 이후 다시 정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니키 라우다(Niki Lauda), 알랭 프로(Alain Prost), 그리고 아이르톤 세나(Ayrton Senna)같은 스타들이 팀을 거쳐 가면서 맥라렌팀은 무려 8년 동안 7번이나 월드 챔피언을 차지했고, 1988년에는 16번의 그랑프리 중 15번을 우승했다.

맥라렌팀은 화려한 80년대를 보냈으나 1992년 아이르톤 세나가 팀을 떠나고, 엔진 공급 업체인 혼다(Honda)와도 결별하면서 다시 잠깐 침체기를 겪었다. 그러나 1997년 메르세데스 엔진을 장착하게 되었고, 1998년과 1999년 미카 하키넨(Mika Hakkinen)이 연속 월드 챔피언을 차지하며 다시 한번 이름을 떨쳤다.

맥라렌이 사망한 후에도 30년 동안 맥라렌팀은 F1 세계에서 독보적 존재로 성장해 왔으며, 승승장구만을 지속해 왔기에 확실한 성공을 가리켜 "맥라렌 웨이(McLaren Way)"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확고한 명성을 이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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