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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 기술, 첫걸음에서 비상까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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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9-09-07 17: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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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 기술, 첫걸음에서 비상까지-3

한국 최초 고유모델 준비, 토리노 모터쇼, 포니양산 준비
이탈디자인에 도착한 우리들은 우선 일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었다. 배워야 할 일에 비해 4명이라는 인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포니 개발 스케줄이라는 것도 그들이 작성한 전체 스케줄 중 우리에게 건네 준 범위 내에서 파악할 수 밖에 없었다. 스케줄에서 빠져 있으면 그 일이 어디선가 진행되더라도 알 수가 없었다.

글 /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 한국자동차공학회 전회장)
출처 / 한국자동차공학회 오토저널


무엇보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의 언어장벽은 우리가 뛰어 넘어야 할 장애물이었다. 설계 책임자인 만토바니(Mantovani)와는 영어 대화가 안되어, 그 아래 총괄 담당하는 엔지니어인 발테리(Balteri)를 통해 통역으로 모든 상황을 전달받고 질문해야만 했다. 우리가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할 상대는 실무자들인데, 이들과 접촉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발테리 자신도 하는 일이 많고 바빠서 대화의 시간을 갖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설계실에 근무하는 많은 사람들은 굳이 영어를 안 해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기 때문에 영어로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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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인 자동차 부품이나 기술 개발에 관한 용어들은 영어와 이탈리아어가 다른 것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Hood는 이탈리아어로 Cofano, Trunk는 Baule, Windshield는 Parabrezza, Roof는Tetto라고 다르게 불렸다. 도면이 완성될 즈음이야 Parafango-posteriore가 Rear Wheel arch 이고, Porta-anteriore가 Front-door라는 것을 파악 할 수 있었다. 한국식 영어로 물으면 이탈리아식 영어로 답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오해도 많았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카로체리아(carrozzeria)라든가 프로토타입(이탈리아어로는 프로토 티포) 등의 용어도 처음으로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들이었다. 당시에는 이탈리아어를 한국어로 설명해 주는 사전도 없어서, 이탈리아어를 영어로 번역한 사전을 보고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의문이 생기는 부분에 대한 대답을 유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잘 모르면 모르는 상태로 넘어가야 했다.

모르는 것이나 궁금한 것은 그들에게 물어보고 배워야 하는데, 갈 길을 어느 정도 알아야 구체적으로 질문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처럼 실감한 때는 없었다. 이탈디자인 내에서 부문별로 팀을 구성해 나름대로의 틀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고, 우리는 그 틀 속에서만 배워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몸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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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설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파악해 가면서 프로토타입 제작이나 마스터모델 제작을 포함한 전체프로세스도 파악하고 정리해야 했다. 당시 이탈디자인은 회사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턴키 베이스로 포니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서 프리랜서들이 이탈디자인에 모여 일하는 급조된 조직인 셈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질문에 친절히 응대할 만큼 실력이나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토리노 시내에 창고 규모의 회사였던 것이 현대자동차의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사세가 커지면서 회사일도 바빠졌다. 우리가 이탈리아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토리노 근교에 큰 부지를 매입해 반듯한 사옥을 짓고 이전한 것이다. 이탈디자인의 규모가 작아서 부분적으로 별도의 외부 용역회사에 용역을 주어 완성한 것들도 많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당시 모든 과정을 직접 확인하고 배울 수는 없었다.

서로간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많아 어떤 것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는데 빨라야 3개월 길게는 1년이 걸린 경우도 있었다. 물론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그린 것을 그대로 모사해서 보관했다. 나중에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매일 토의를 통해 일지 형태로 정리해 나갔다. 그 작업내용들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정리해 나가는 일을 내가 담당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전반적인 프로세스를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들은 후에 출장 보고서를 쓰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자료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해 모아둔 것이 후일 우리가 자체적으로 일을 추진할 때 큰 보탬이 된 것이다. 그 자료는 보고서 작성에 그치지 않고 훗날 추가로 우리 팀에 배정된 직원들의 교육자료로도 활용되었다. 모터쇼에 출품하기 위한 차량을 만들기 위해서 도어 프레임을 비롯한 내외 패널이나 의장 부품 등의 많은 부품들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손재주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일하는 자세도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

콧노래를 불러 가면서 여유롭게 일을 하는데도 완성된 수제품의 수준을 보면 금형으로 찍어낸 것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혼이 들어 있다고나 할 까? 같은 재료의 쇠로 만들었는데도 빛이 나면서도 무게가 있어 보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해 온 카로체리아의 명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땀을 비 오듯 흘려 가면서 일을 하고 있었고, 카로체리아를 지키고 있는 장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확실하고 여유있게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끝내고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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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나온 경영자들은 도토레(영어로 닥터)로 깍듯이 예우를 받고 있었고, 이 도토레들도 작업자들만은 깍듯이 장인으로 대접해 주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자취 생활은 요즘 출장자 생활과 비교하여 너무 대조적이었다. 텔렉스와 편지를 통한 교신이 전부였고, 전화는 불가능했다. 서울과 연락도 여의치 않았다. 텔렉스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약자를 사용하여 되도록 간결하게 줄여 보내야 했다. 편지도 한국에서 항공우편으로 보낸 편지가 보통 1개월은 되어야 배달되었다. 이것도 그나마 빠른 편이어서, 2개월이 되어서야 배달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편지가 배달되지 않고 실종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현지인들은 이탈리아 우체부 중 일부가 편지를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나는 아내가 첫 애를 낳았다는 사실도 텔렉스 한 줄을 통해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당시 신혼 8개월 만에 출국했고,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6개월 된 첫 애를 공항에서 처음으로 안아 보았다.

토리노 모터쇼에서 포니의 자태에 반하다.
귀국하기 전인 1974년 10월 29일, 정세영 사장과 함께 포니 프로토타입이 국제무대에 첫 선을 보인 토리노 모터쇼를 참관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로서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토리노모터쇼장의 현대자동차 부스에는 포니 세단과 포니 쿠페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막상 현장에서 대면을 하니 다른 호화로운 모델들보다 포니가 훨씬 멋있게 보였다. 유럽 메이커들의 쟁쟁한 모델들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나의 눈에는 포니만 보였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다. 포니를 통해 고유 모델 생산국 대열에 오르는 순간이었고, 지금 돌이켜 보면 정주영 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꿈과 함께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오늘을 있게 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당시 언론은 한국이 세계 16번째 고유 모델 생산국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지금도 대부분 자료는 16번째로 인용하고 있지만, 틀린 이야기이다. 고유 모델 생산국으로는 9번째가 맞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국가로서 16번째라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생각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포니와 포니 쿠페 프로토타입을 토리노모터쇼에 출품한 것은 엄청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급하면서도 손재주가 많은 이탈리아와 한국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뜨거운 국민성의 합작이었다. 자동차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선 저지르고 보는 한국의 현대식 불도저 경영과 턴키 베이스의 포니 프로젝트를 성공시킴으로써 사세를 확장하고 한 단계 도약하겠다는 이탈디자인이 합심으로 이루어 낸 일이었다.

자동차 스타일링 귀재인 주지아로가 가지고 온 아이디어 스케치 3가지 안을 놓고 정세영 회장실에서‘꽁지빠진 닭’모양의‘A’안으로 결정한 것이 1973년 10월 15일.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974년 2월 25일에 설계를 착수하고, 설계에 착수한지 8개월 만에 모터쇼에 출품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모터쇼용 프로토타입 제작에 착수한 것이 그 해 4월 5일이었으니, 착수 6개월 만에 전혀 다른 2대의 차인 포니와 포니 쿠페를 이탈리아 카로체리아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결국 포니의 출품을 통하여 양사 모두 성공의 기틀을 마련한 순간이 된 셈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과‘빨리빨리 스케일’은 한국에서도 속도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정주영 회장 사단의 사람에게도 이해하기 힘든 대사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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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쇼장에는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는 물론, 피아트와 란치아, 알파수드 등 이탈리아 업체의 화려한 모델들이 즐비했다. 뿐만 아니라 람보르기니, 피닌파리나와 베르토네, 기아(Ghia)와 이탈디자인과 같은 카로체리아들의 부스도 위용이 대단했다. 이에 비해 미국의 포드와 GM, 프랑스의 푸조, 시트로앵이나 르노, 영국의 BLMC, 랜드로버, 심카(Simca) 등도 출품했지만 카로체리아 출품작에 비해 한 수 아래로 보였다. 그 당시 내 눈길을 끈 차들은 신선한 디자인의 란치아와 아우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가 그 대열에 끼었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자랑스럽기는 했지만, 엄청난 경쟁자들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쟁쟁한 선진 모델들을 보면서‘한 번 붙어 볼 수 밖에 없고,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그 이후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변할수없는나의운명이자신조가되었다.‘ 무식하지않고 는 이렇게 용감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생각해 봐도 더욱 대단한 것은 모터쇼에 출품한지 1년 4개월 만에 포니 양산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부품업체나 양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것을 동시에 시작해서 이 기간에 끝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프로토타입이 출품된 토리노 모터쇼가 1974년 10월 30일부터 11월 10일이었고, 1976년 2월 27일에 출고가 되었다. 당시에는 앞만보고 진행하다 보니까 몰랐지만, 이번에 정리를 하며 생각해 보아도,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진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될 뿐이다.

포니의 양산 준비
고난과 자취의 이탈리아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74년 12월. 연말이 되어 이탈디자인에서 그 때까지 완성된 도면을 모아서 싸 들고 귀국했다. 우리들은 새로운 선진구라파 문화와 문명을 접하고 무언가를 배웠다는 충만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울산의 뻘밭(울산공장이 바닷가 뻘 위에 지어졌음) 위에 고유 모델 자동차를 생산해야 했다.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상황으로, 지금이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막막하기만했다. 우리가 배워 왔고, 또 가지고 온 도면만 있으면 그냥 포니가 양산될 것이라고 기대했고, 우리 자신들도 그렇기를 바랬다. 하지만, 자동차 개발 및 생산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면서 우리의 기대가 너무 무지하고 무모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말이 좋아 준비작업이지 무엇을 어떻게, 어떤 순서로 해야 할지에 대한 프로세스를 세우는 것조차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은 정주화 팀장을 중심으로 소형 설계부를 구성하고, 그 아래에 소형 바디과와 소형 섀시과로 구분해 팀을 구성했다. 이 팀도 후에는 시작 및 시험담당 부서로 옮기면서 소형 바디과가 1, 2과로 나뉘어졌다. 우리는 소형 승용차를 개발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어떤 일을 어떻게 벌여야 할 지 하나하나 정해가기로 했다.

이탈리아에서 진행되었던 일들을 모두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여 가져오기는 했지만, 도면을 정리하고 양산 준비를 해 가는 과정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포니 프로젝트는 미쓰비시 자동차회사로부터 섀시를 비롯하여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포함한 플랫폼을 CKD 상태로 도입하고 그 위에 이탈디자인이 설계한 차체를 조립해서 얹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섀시 도면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바디 도면을 받아온 셈이다. 우선 가져온 도면 사양에 맞는 부품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었다. 바디부품들은 이탈리아식 도면과 규격에 맞춰 개발해야 했고, 섀시 부품은 일본 공업규격에 맞추어야 했다. 이탈디자인으로부터 받은 사양들은 이탈리아어로 되어있어 외국어대 이탈리아어과 출신자에게 번역을 의뢰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가 받은 도면은 어셈블리 도면들이 거의 전부였다. 구라파나 일본에서는 부품업체가 상세 도면을 소유하고 있어 어셈블리 도면들만으로 자동차 개발이 가능했지만, 한국에서는 부품업체가 전무 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작이 불가능했다. 우리는 한국 실정에 맞춰 상세 도면을 다시 그려야 했다. 상세 도면을 가지고 흉내를 내서 만든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어떤 재료로 만들어서 어떻게 검사하고 시험하는지를 확인하는 방법도 문제였다. 만드는 부품의 재료 사양이 필요했다. 검사 및 시험방법도 만들어 내야 했다. 혹, 운 좋게 이것이 있는 것도 이탈리아나 일본 규격들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일본 공업규격인 JIS 대신 KS규격으로 전환하는 등)을 해야 했다. 특히 이런 기준에 관한 자료를 일본의 자동차 제작사 또는 부품업체들이 잘 주지 않아 애를 먹은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줄듯 줄듯 하면서도 쉽게 주지 않던 일본 사람들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인심 좋은 한국회사나 사람들이 중국을 포함한 개도국에 경쟁적으로 펑펑 퍼주다시피 넘겨주고 있어, 당시의 어려웠던 사정과 비교하면 너무 대조적이어서 안타깝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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