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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 기술, 첫걸음에서 비상까지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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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9-10-24 02: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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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고유모델 준비, 포니 양산 준비
우리는 이탈리아 토리노에 위치한 이탈디자인에서 포니 설계를 배우고 돌아왔다. 하지만, 일종의 청사진(Blue Print)만 받아온 것이지 그 이면의 노하우(Know-How)는 전혀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만의 고유한 방식을 만들어내야 했다. 5만대 이상의 조립공장 시설까지 새로 만들어 내야하는, 겨우 2~3천대 수준의 CKD조립만 해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큰 프로젝트였다. 1968년 말부터 1975년까지 7년 동안 포드차를 조립하면서 상당한 CKD 조립기술을 축적했지만, 이미 개발이 완료된 차를 가져다가 그 사양에 맞춰 조립만하는 작업이었을 뿐, 신차 개발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일이었다. 결국 우리가 직접 전체 차량 개발 과정과 도면의 기준을 새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글 /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
출처 / 한국자동차공학회 오토저널


생산 설비 선정과 발주, 부품 개발 업체 선정 및 조립용 부품 제작을 의뢰해야 했다. 부품 공급처 선정은 차체 및 의장 부품 외에도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를 해서 도입하기로 한 섀시 부품들도 포함시켜야 했다. 주어진 도면으로 라인에서 조립을 해 본 경험은 있었지만, 도면과 플랫폼만 가지고는 양산을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어느 것 하나도 명확한 것이 없었다. 어떻게든 해내고야 마는 한국사람들 이라지만, 한번도 해 본적 없는 새로운 고유 모델의 승용차를 자체적으로 개발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 아니었다. 경영진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논란과 시행착오
를 겪은 뒤에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故)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당시 현대자동차 사장)은 해외 선진 자동차메이커 출신으로, 자동차 개발 경험이 있는 전문 경영인과 기술자들을 구하는 일을 지시했다.

기술자문단은 영국 BLMC의 부사장을 지내다 경영권 다툼으로 물러난 조지 텀블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故)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은 조지 텀블을 영입하면서“그가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였던 게 더 큰 매력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는“패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패배를 만회하려고 노력하고 그 집념은 남다른 추진력으로 이어진다”고 밝힌 적이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들이 요구한 수준에 맞춰 주거공간을 별도로 지어주는 것은 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액의 연봉(4만 달러로 기억된다. 당시 과장급 연봉이 500달러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이다.)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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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텀블의 기술 지도 아래 첫 국산 승용차‘포니’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텀블 부사장은 전체를 총괄하고, 그 아래 시험 담당 슐레이터, 바디설계 담당 바네트, 섀시설계 담당 레이시(처음에 크로스 웨이트가 왔었지만 실력이 없어서 레이시로 바뀌었음), 그리고 금형 & 프레스담당 심슨과 생산기술 담당 차프만 이렇게 6명으로 구성됐다.

우리는 기술자문단과 함께 이탈디자인으로부터 받은 도면과 프로토 타입, 그리고 마스터 모델을 가지고 양산과정에 이르기까지의 프로세스를 완성해 나가야 했다. 그들은 금형이 필요하면 유럽의 어느 업체가 경쟁력이 있고, 생산 라인에 필요한 컨베이어 라인은 어느 업체의 기술력이 앞서 있다는 등,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 개발작업은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차량을 처음부터 개발한 경험이 없고, 가지고 있는 기술은 유럽 중심의 기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극히 제한된 범위의 지도만 받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들 나름대로의 양산까지 가는 로드맵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탈 디자인의 도면과 프로토 타입(수작업으로 제작됨)은 라인에 올리기 위한 검증이 전무한 상황이어서 양산을 시작하기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우리는 그 도면을 가지고 생산으로 이어지는 작업을 스스로 검증하면서 진행해 나가야만 했다. 팀장인 조지 텀블은 주로 경영진과 함께 큰 그림들을 그려 나갔다. 해야 할 일들과 방법, 해서는 안될 것들과 예상 가능한 문제발생 등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일을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자문단은 자문만 할 뿐이었다. 단편적으로는 도움이 되었고, 심적인 의지는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구체적인 것들은 전부 우리가 계획하고 결정하고 추진하고 해결해야 했다. 그들도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풀어내야만 했다. 예를 들어 프레스장비는 프랑스의 어느 회사가 좋은지, 구라파 기계와 일본의 기계 중 어느 것이 좋겠는가를 선정하는 일은 우리가 조사해서 알아내고 결정을 해야 했다.

조지 텀블을 비롯한 자문단은 주로 영국 자동차산업계에서 경험하고, 배운 사람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포드와 GM이 영국에서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어서, 그들은 유럽 외에도 미국의 자동차 기술과 문화를 고루 경험한 상태였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운전하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자동차 운전 문화를 접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자동차 개발 기술뿐 아니라, 기초적인 자동차 용어에서부터 페달들을 조화롭게 사용하면서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방법 등 여러 가지 자동차 운전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공장 안에서 잠깐 움직일 때도 운전석에 만 앉으면 시트 벨트를 착용하는 그들을 보면서 자동차 선진 문화나 습관에 대한 세세한 것들까지 배울 수 있었다.

본격적인 양산화의 시작, 도면검증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시작실(프로토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곧바로 시행에 옮겼다. 박광남 과장은 시작실과 시험을 맡았고 허명래 대리는 슐레이터의 파트너가 되어 시험을 집중적으로 배웠고, 나는 바네트의 파트너가 되어 바디 설계 및 도면 출도에 대한 전 과정을 숙지해 나갔다. 바네트는 영국인 이었지만 인도에 파견되어 자동차의 차체 설계를 하고 있다가 자문단 팀에 합류한 착실한 엔지니어였다. 그는 이탈리아로부터 입수한 바디 도면 전체를 검증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부품의 제작 가능여부부터 시작해서, 도면에서 빠진 부품은 없는지, 금형 제작은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지, 이중 치수 표기는 없는지, 판넬 두께는 적절한지 등등 도면을 검수하는 일이 신차 개발 작업의 시작이었다. 다행히 바네트는 답답할 정도로 꼼꼼하고 정확한 성격이었다. 그는 검도(도면 검수를 당시에 그렇게 표현했다)에 적격인 엔지니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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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직접 한 장 한 장 전체의 도면들을 검도를 해서 도면들을 완성시켜 나갔다. 도면 한 장을 통해서 설계하는 사람은 부품 제작자나 생산 라인의 조립자 들과 소통을 하고, 의사 전달의 유일한 수단이고 또 그 것이 전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셈이다. 검도란 도면이 갖추어야 할 것은 빠짐없이 갖추었는지를 확인하고 후속 공정이나 시장에서까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점들을 예측, 그에 대한 대응 솔루션까지 준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도면 전체를 한 장도 빠짐없이 다시 그리다시피 하면서 작업을 진행해나갔다.

우리는 도면화 작업을 이탈디자인에서 배웠지만, 도면들을 완성시키고 검도 해서 출도 하는 작업은 바네트 몫이었다. 다행이 바네트는 세심하게 검도 역할을 잘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그가 꽤나 느리게 일을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그의 꼼꼼한 성격이 포니 프로젝트의 성공요인 중 하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설계도면 어느 한 장의 표시 한 개도 소홀하게 다루어서는 그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없다는 큰 교훈도 배운 셈이다.

도면은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어서 다시 영어로 바꾸어야 했다. 바꾸고 보니 이탈디자인에서 그려온 도면들은 도면에 포함해야 할 내용이나 사양이 많이 누락 되어 있거나, 당시 우리나라 자동차부품 산업 수준으로는 아예 없는 도면도 있었다. 예를 들어, 램프 도면들을 귀국해서 받아 보니 껍질 (Skin surface)도면만 그려서 우리에게 준 것이었다. 그 당시 유럽 업계에서는 그렇게만 그려주면, 램프업체가 자동차 메이커와 협의해 가면서 상세 부품 도면들을 그려서 승인을 받은 후 제작하면 되었다. 당시 이탈 디자인은 이런 수준의 아웃 소싱 도면을 그려주는 프리랜서 집합체였다. 우리들은 결국 경험 있는 일본램프업체들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고, 이런 방법으로 그들과 기술제휴를 통해 한국 업체들을 하나 둘 키워 나갔다. 우리는 도면을 출도하고, 그에 맞도록 재료에 대한 상세 사양이나 검사 기준을 만드는 일도 같이 해내야 했다. 부품 제작이나 조립을 위해서는 필수 항목들이었기 때문이다.

국산부품 개발의 필요성을 깨닫다.
도면이 출도 된 후 부품을 개발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 영국, 일본 등에서 어떤 업체를 선정하느냐에 대한 검토작업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 자동차 산업은 인프라와 기술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해외업체 선정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로 많이 접촉하고 공급을 받기로 결정된 것은 일본, 특히 미쓰비시 관련 업체가 대부분이었다. 부품들 중 극히 일부분 (예 ; 시트벨트, 백 미러 등)은 구라파와 일본의 것을 들여와 융합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는 설계부터 양산까지 다국적 기술이 모두 동원됐다는 것을 말한다. 그때까지 미군이 불하한 엔진으로 자동차를 만들기도 하던 시절이어서,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자동차 문화의 영향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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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포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 생각과 문화가 조금씩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는 닛산 블루버드가 수입된 적이 있었고, 마쯔다의 브리사 모델이 조립 생산되는 등 일본차가 이미 국내에 들어와 있었다. 한편 현대자동차에서 조립하고 있던, 미국 기술로 설계된 영국제의 포드 코티나가 이러한 일본 자동차에 비해 한국 도로 사정에 덜 적합하다는 평가와 함께, 한국사람들에게 친근감이 적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택시 기사를 포함한 시장에서의 이런 평가는 경영진으로 하여금‘굳이 미국 메이커로부터 기술을 들여 올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는 자동차 생산 기술은 미국이 가장 앞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가 포드차를 조립해 보지 않았다면 미국 자동차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미국 업체들을 주로 선정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포드나 GM은 고유 모델을 만들겠다는 현대의 생각과는 엄청난 거리감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세히 들여다 보면, 포니 프로젝트는 다국적 기술의 종합 작품이었다. 우선 플랫폼은 일본의 미쓰비시, 설계 디자인은 유럽의 이탈디자인으로부터 받아왔고, 생산 기술은 영국 자문단의 자문을 응용하였다. 개발이나 양산 단계로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생산기술들은 지역적으로 거리도 가깝고, 우리 입맛에 가장 가깝게 제시하는 일본 방식을 도입하였다.

전체 마스터 모델의 금형은 일본의 오기하라에게 맡겼다. 이때부터 일본의 금형 업체를 비롯한 설비업체들도 큰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본다. 현대자동차의 포니 프로젝트를 계기로 이탈디자인도 유명해졌고 더불어 일본 업체들도 사세를 확장하게 된 것이다. 일본 업체를 선정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리적으로 일본이 가까워서 좋았고, 취급하기가 쉽고, 세심한 부분까지 스펙을 맞춰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같은 동양인이라는 점 때문에, 의사소통이 쉬웠다. 뿐만 아니라 가격도 구라파의 경쟁업체보다 낮게 책정할 때가 많았다. 오기하라는 세부적인 부품의 금형을 어떤 업체에 맡길 것인가에 관한 권한까지 가져갔다.

그런 인연으로 차체 조립 시 필요한 Jig & Fixture 까지도 일본에서 제작해 왔다. (Jig란 가공용, 검사용, 조립용, 측정용, 조정용 등의 보조기구를 말하고 Fixture란 보통 가공, 측정, 조립 시 사용하는 고정용보조기구를 뜻한다.) 한편으로 미쓰비시는 그들의 기술이 한국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신경을 썼다. 특히 미쓰비시 기술자들이 한국을 방문하거나 우리측 기술자들과 회의라도 할 때면, 미쓰비시 상사 소속의 감시자가 항상 동행하였고, 그들의 체재 비용까지 모두 우리측에서 지불 해야만 했다. 현지 생산을 하게 되었을 때는 엔지니어들이 한국을 방문해 직접 설치 하기도 했다. 우리가 그들의 기술을 배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부품업체 선정등 많은 부분에서 미쓰비시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엄청난 수업료를 내고 배워 온 셈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 기술로 개발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또, 모든 신기술들을 미쓰비시와 공동으로 개발할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정세영 회장을 중심으로 전 스텝들은 자동차개발 기술과 생산 기술 등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데는 절대적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국내 생산이 가능한지 여부를 최우선적으로 잊지 않고 짚어 보았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현지화 단계를 넘어 국산 기술력으로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국산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예를 들어, 동양기계로부터 트랜스미션과 차축을 공급받아 코티나에 장착하는 것을 검토한 적이 있는데, 포드에서 극렬하게 반대했다. 만약 동양기계의 부품을 쓰려면 코티나에 포드 마크를 붙이지 말아야 한다고 까지 말할 정도로 한국 부품 업체의 기술력은 낙후되어 있었다.

부품 개발 업체를 선정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항이었다. 부품업체 선정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가 현대자동차의 국산화율(%)나 미래 품질과 경쟁력 등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생각해보아도 결코 소홀히 해선 안될 일이란 것은 확실했다.

포니 프로젝트는 그래서 단순히 고유 모델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어디까지 국산화 하느냐에 대한 과제까지 포함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공장 내에서 자체적으로 개발 생산할 지, 아니면 외부 업체에게 의뢰할 지 여부를 그때그때 결정해야 했다.

부품 개발을 위해 우리는 국내에 있는 가능한 업체 모두를 동원했다. 하지만 당시 울산에는 부품업체가 없었고, 부산과 대구에 일부 그리고 인천 남동공단 등 수도권에 대부분이 분포해 있었다. 후보 업체 군으로는 이미 포드차의 부품을 개발했던 곳은 무조건 등록시켰다. 그러면서 국산화 계획이라든가 국산화율, 국산과 수입 부품간의 품질 비교, 가격 비교 등 경쟁력이라는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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