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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 기술, 첫걸음에서 비상까지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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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9-12-19 12: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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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고유모델 준비, 포니 양산 준비

“현대자동차는 자동차가 뭔지 모르고 생산 판매하고 있다?”
포니 양산목표는 1975년 말로 정해져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맨땅에 헤딩하기’식으로 의욕만 갖고 우리 차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뛰어 들었지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해야 할 모든 일들을 새롭게 정하고, 처음으로 해 보는 일의 순서와 절차를 새롭게 정해 나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글/이충구(전 현대자동차 시장)
출처/한국자동차공학회간 오토저널 2009년 12월호


미쓰비시 자동차로부터 자동차 섀시 기술을 이전 받기로 한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길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잘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기술제휴의 범위에 대해서는 서로 해석의 차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받는 자와 주는 자간의 생각 차이는 엄청 컸다. 받는 입장에선 개발 경험이 없어 이것저것 다 알아서 주기를 바랐고, 주는 입장
에선 미래 경쟁자를 키울 수 있다는 생각에 주기 싫어하는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양자간 기본적인 생각과 바람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미쓰비시 자동차는 미쓰비시 중공업과 함께 탄탄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SUV인‘파제로’가 파리∙다카르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도요타, 혼다, 닛산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을 가진 업체로 부상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자동차 기술이 유럽에서 태동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대중화 시대를 열고, 이제 일본의 우수한 생산기술력을 기초로 일본 자동차 산업 경쟁력이 중흥기를 맞기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1970년대 1차 오일쇼크 이후에 혼다 시빅과 도요타 카롤라를 중심으로 일본 자동차들이 미국시장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부럽기도 했고, 일본의 자동차 기술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보여 주기를 꺼려 했고, 물어도 감췄고, 또 숨겼다. 기술자들끼리 만남이나 회의는 철저하게 통제되어 만남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렵게 답을 받더라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 답 중에는 시간이 지난 이전 세대 것인 경우도 많았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 자동차 기술자립 기간 동안 미국이나 구라파에서 너무 힘들게 도입한 기술이었기에, 쉽게 한국에 넘겨 줄 수 없었을 것이라 이해는 된다.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이 20~30년 사이에 미국이나 구라파의 선진 기술을 따라 잡으면서 그들에게 느끼게 했던 이노베이션 딜레마를 한국에게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이미 그들에게는 가슴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양사 사장단 회의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양사간 상호 방문 및 회의 실시 여부까지도 미쓰비시상사의 통제와 승인 과정을 거쳐서 결정되었고, 모든 회의에는 미쓰비시 상사 직원들이 항상 동석해서 확인하고 감시했다. 이 원칙은 석식 만찬이나 2, 3차의 술자리까지도 철저하게 지켜졌다.

미쓰비시는 물론 미쓰비시에 납품하고 있던 자동차 부품 제작회사를 접근하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했다. 현장방문은 금형을 발주하거나 부품을 발주한 뒤에야 가능했다. 부품회사를 통한 기술이전까지도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품이나 제조 장치 및 시설을 통한 의도하지 않은 기술 유출을 철저하게 통제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 당시 처음으로 방문 할 수 있었던 일본의 자동차부품 생산공장은‘오기하라 제작소’와‘후지철공’이었다고 생각된다. 포니용 도어를 포함한 내∙외판용 프레스 금형을 제작해서 사 왔는데, 생산관련 엔지니어들이 방문을 통하여 금형 제작과정 및 방법에 대하여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모든 미쓰비시 계열사로부터 수입해 온 부품이나 시설의 가격에는 그들이 모회사인 미쓰비시에게 지불하는 몇 %씩의 별도 비용이 더 붙어 있었다.

미쓰비시 엔지니어들이 한국에 파견될 때는 한국에서의 체류 비용도 모두 우리가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고, 사람 수대로 기술 자문료를 받아갔다. 우리가 일본에 있는 미쓰비시 연구소에 갈 때에는 질문서를 미리 보내야 했고, 만나야 할 사람이 결정되고, 허가를 받고 나서야 가능했다. 게다가 우리가 담당 엔지니어의 파견을 요청해도, 어려운 통제 과정을 거쳐서 엔지니어를 보내 주었고, 엄청난 생색을 내기 일쑤였다. 물론 우리가 일본에 가서 그들을 만나거나, 그들이 와서 일한 것에 대한 대가도 꼬박 꼬박 챙겨갔다.

그로부터 22년쯤 뒤인 1997년 IMF 를 전후해서 일본부품업체들과의 기술 제휴를 거의 모두 유럽이나 미국업체로 바꾼 것은 이러한 일본 업체들의 감추고 숨기려는 속성에 기인한다. 미국회사인‘델파이’,‘ TRW’,‘ 리어’및‘존슨컨트롤’을 비롯해 유럽의‘보쉬’,‘ 지멘스’,‘ 발레오’등 글로벌 부품업체들로 소싱이 확대되었고, 일본부품 업체와 제휴는 줄어들게 되었다. 물론 현대자동차를 포함한 한국 자동차회사들의 구매력이나 기술력이 커졌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국적 기술 및 문화 습득의 기회를 갖다.

포니 프로젝트는 다국적 자동차 기술 및 문화가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포드로부터 CKD 자동차 조립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이탈디자인으로부터 설계를 받아 왔고,미쓰비시에서 도입된 플랫폼 뼈대 위에서 미쓰비시 계열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자동차 부품 제조기술 및 생산시설들을 도입해서 융∙복합한 작품이었다. 일본 미쓰비시의 플랫폼을 들여다가, 미국∙영국∙독일 포드의 CKD 조립기술을 바탕으로, 영국 BLMC 출신 기술자들의 자문을 받아 가면서, 이탈리아 스타일링의 귀재인 쥬지아로의 디자인과 이탈리아 설계기술이 융∙복합된 자동차기술 개발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혼합하고 섞어서 취사선택하면서 만들어 낸 기술개발의 주체는 한국의 기술자들이었다.

설계도면은 미쓰비시와 이탈디자인에서 만들었고, 도면을 검수하는 일은 영국출신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아 완수해서 출도했다. 프레스기계는 영국 출신의 심슨의 자문을 받아가면서, 일본과 구라파에서 들여왔고, 대부분의 생산시설들은 일본에서 들여 온 셈이다. 일본에서 직접 수입해 온 부품들과 오기하라에서 제작해 온 금형으로 울산 공장에서 찍어낸 철판으로 조립을 시작했다.

이렇게 다국적 기술이 혼합된 생산시설과 생산기술의 토대 위에 한국최초의 고유 모델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자동차를 어떻게 설계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설계할 수 있는 사무실을 준비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였다. 이탈리아에서 본 기억을 바탕으로 설계를 담당할 엔지니어들이 사용할 사무실을 만들어야 했다. 스케치해서 그려왔던 제도 테이블은 높이를 우리 체구에 맞도록 만들어서 설계사무실에 배치했다. 테이블 위에 도면을 눌러주는 생쥐 모양의 문진도 스케치 해 온 것과 흡사하게 주물을 부어 제작해서 각 제도 테이블마다 2~3개씩 올려놓고 사용했다.

차체 크기와 동일해야 하는 스킨 레이아웃(이탈리아어로“피아노 디포르마”라고 한다)과 헤비터빌리티(이탈리아어로“아비타빌리타”) 도면용 제도판도 이탈디자인사의 것보다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제도용 도구들이 나 제도용지들은 이탈리아나 독일에서 수입해 들여왔다.

이 과정에서 실제 자동차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미쓰비시자동차의 설계사무실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오카자키에 있는 미쓰비시의 설계사무실을 들여다 보는 것은 그로부터 15년쯤 뒤에 중역이 되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23년 뒤인 1998년 어느 날, 미쓰비시 자동차의 나카무라 회장이 남양연구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포니 개발 당시에는 미쓰비시 교토 엔진개발연구소의 소장이었던 나카무라 회장이 남양연구소를 방문한 것이다. 윈드 터널까지 갖춘 남양 종합연구소를 둘러 본 소감으로는 시설이나 사무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않고, 본관 건물 앞에 갖춰 놓은 정원의 소나무들이 탐스럽고 부럽다는 이야기로 모든 것을 감추어 표현하였다.

우리는 목표에 맞춰 양산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도 배우는 재미와 의욕으로 충만해 있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도면들이 도착한 뒤 1년이 채 안 되는 1975년 말까지 양산한다는 목표로 프로젝트는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해 보지 않은, 무식한 사람만이 용감할수 있다’라는 말이 실감나던 때였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에서 귀국했을 때 대졸 6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공고출신 제도사 6명을 추가해서 열두 명으로 시작하였다. 같이 일하다가 밤새는 줄도 몰랐고, 한밤중에 일하다가 배가 고플 때에는 전세 들어 있던 13평짜리 아파트에 가서 집사람이 끓여주는 라면을 먹고 나와서 다시 일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이야 과거를 회상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새로운 일 앞에서, 어떻게든 일을 해결해 내야 한다는 목표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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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기능과 조직이 갖추어진 오늘날의 상황에서 포니 프로젝트를 본다면 상당히 짜이고 체계가 잡혀있는 업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자동차를 개발하는 과정이었기에, 프로젝트에 필요한 기술 관련된 모든 사항들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준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지고 분석해서 해결해야 했다. 예컨대, 입법, 행정, 사법으로 비유할 수 있는 모든 사항들을 수행했던 셈이다. 도면을 작성해서 배부하고(입법), 부품을 개발해서 조립하는 과정의 기술지원 및 유권 해석(행정), 입고된 부품이 제대로 만들어 져서, 조립이 되어 목표 성능을 발휘하는지 판정하는 기준도 만들어야(사법) 했다.

우리는 설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배워나갔다. 도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조립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점들을 예측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느끼고 배운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너무 어렵게 비싼 대가를 치러 가면서 배워야 했다.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명쾌한 해결책을 내놓지도 못 할때가 많았다. 실제 조립 단계에서 맞아 들어가지 않으면 원인 분석하는 데도 새로운 시간이 필요했다. 조립과정에서 와이퍼 작동이 되지 않는 차도 있었다. 이런 과정 자체가 처음인 우리에게는 모두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울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 분석을 하고, 또, 해결책을 내야 했다. 그 일이 설계도면을 출도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크고 어려운 엄청난 일이었다.

문제점들이 실제 차량이 조립된 후에야 쏟아져 나왔다. 문제들이 차에 따라, 부품에 따라 달라서 일관성도 없었다. 특히, 무빙 파트(도어류) 문제점들은 복잡하고 개별성이 높아, 각각의 차량별로 문제점들을 해결하면서 배워갔다. 설계라는 것이 종합적인 경험과 노하우의 축적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금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시만 해도 1년 혹은 3년, 길게는 10년이 걸려 해결한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아직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프로토타입 (손으로 두들겨 만든 실제와 똑 같은 차)을 가지고 시험 주행을 했다. 그러나 시험장이 없어 방어진까지 왕복하기도 하고, 울산 공항을 빌려서 제동시험을 하는 등 주행 및 평가시험 작업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울산공장에서 경주까지 가기도 하고, 밤을 세워가면서 울산~서울까지 왕복하기도 했다. 오늘날과 같은 프루빙 그라운드에 대한 개념도 우리에게는 있을 수가 없었다. 기술 자문단의 시험담당자인 슐레이터가 시험해보고 문제점을 지적하면, 해결해 내야 했다. 당시 조수석에 앉아서 운전 스킬을 배운 3~4세대 후예들이 남양 프루빙 그라운드의 주역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었고, 한국도로 실정에 맞는 차를 개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차안으로 비가 새지 않아야 하고, 먼지가 들어오지 않아야 하며, 잡소리(그 당시에는 소음이라는 용어 대신에 이렇게 표현 했다.)가 적어야 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섀시부품들이 덜컥거린다거나 일찍 마모되거나 내구성이 부족한 것들이 문제가 되었고, 물이나 기름이 새는 원시적 문제들의 대부분이었다. 시험과 조립개발 과정을 거쳐 피드백 받으면서, 우리는 생산 품질 및 부품 개발 초기 품질목표의 큰 틀을 확정해 나갔다.

그런 와중에 미쓰비시 자동차의 구보 회장이 정주영회장의 초청으로 울산공장을 다녀간적이 있었다. 현대자동차 경영자를 만나고, 공장 방문을 마친 후에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그가 한 말이 우리를 크게 자극했다. 그는“현대자동차는 자동차가 뭔지를 모르고 조립하고, 판매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에 밤낮 없이 열심히 뛰고 있던 우리로서는 너무 서운한 말이었다. 이해도 안 되고, 그래서 크게 격분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충정 어린 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감나는 발언이었고, 맞는 얘기였다. 구보 회장의 지적대로 우리는 자동차를 몸소 느끼고 부딪히면서 배우고 알기 시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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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구보 회장 이야기의 숨은 뜻을 자동차 격전장인 미국시장에 진출한 뒤에야 실감나게 이해하게 되었다. 1986년 포니 엑셀로 미국시장에 진출한 뒤, 고객들이 원하는 자동차가 무엇인지를 10년 이상 공부한 셈이고, 그 과정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도 미국시장에서 원하는 상품을 다시 준비해서 재진출 준비를 한 1998년쯤이 되어서야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구보 회장이야말로 진정으로 현대자동차의 미래를 걱정했던 고마운 사람이었고, 구보 회장의 뿌리 어딘가에는 한국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도 한참 뒤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 자동차산업 태동기에 현대자동차는 일본자동차 기술과 기술 개발 문화, 일본 자동차 부품회사의 문화를 배우고, 또 우리도 모르게 받아들이면서 커 가고 있었다.

제품개발 일정은 우리의 실력과 상관없이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세영 사장은 1975년 6월까지 연간 5만 6천대 규모의 엔진공장을 완공하고, 11월까지 주조 및 단조 공장을 지은 후, 1976년 1월에는 반드시 고유 모델 포니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시간표를 갖고 있었다. 턴블이 일정표를 보고, 그가 배운 경상도 사투리로‘택도 없다’고 하였다. 정세영 사장은 2년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자동차를 개발하고 생산해 본 경험이 있는 턴블은 적어도 4년은 필요하다고 했다. 그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해 낼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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