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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기술 첫 걸음에서 비상까지-9. Y카 스텔라 프로젝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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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0-08-07 01:4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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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에도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순서와 경중을 가릴 것이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 해 연초 수립한 연간계획을 보면 Y카 프로젝트, 즉 스텔라 개발에 관한 것이 가장 큰 것이었다.

나는 1979년 초 나름대로 그 해에 해야 할 일에 대한 다짐 사항을 정리했다. 첫 번째가 R&D 업무를 시작하는 해로 하자는 것이었다. 연구개발팀이 있어야 제대로 된 차를 개발하고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것은 이탈디자인에게 일을 맡길 수 밖에 없었고, 일본 자동차회사 및 부품회사들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느낀 절실함 때문이었다.

글 /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 한국자동차공학회 전회장)
출처 / 한국자동차공학회 오토저널 2010년 8월호


경쟁차를 티어다운 해서 자료화 하는 것도 그 해의 목표였다. 우리는 포니 급의 미쓰비시 미라지와 스텔라 급의 아우디80을 들여와 벤치마킹 작업에 들어갔다. 다음모델을 개발할 때 참고하기 위해 샘플카를 완전히 분해해서 내용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비교 데이터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차체의 구조에 대한 상세한 스케치를 포함해서 스팟 용접점의 숫자를 세고, 차체 각 부위별 철판 두께를 측정해서 기록해 나갔다. 차 전체를 하나하나 의 부품 단위로 분해하고, 볼트 너트 하나까지 정리하고 무게를 적어 비교표를 만들어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중량 차이가 많이 나는 부품들은 팀 별로 비교해 가면서 재료의 분석을 포함한 개선 방안을 따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전 세계 수출 대상국가의 법규를 정리해 비교 차트화하는 작업도 큰 일이었다.

이런 가운데 Y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스타일링은 이탈디자인에 의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였고, 프리젠테이션 모델도 이탈디자인에 비싼 돈을 들여 다시 의뢰했다. 포니가 미쓰비시 랜서의 플랫폼을 베이스로 한데 비해서, 스텔라의 플랫폼은 당시 울산에서 조립하고 있던 코티나 마크4의 것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4월까지 플랫폼을 확정하고 차체와 전장품, 의장품을 6월 초에 설계에 착수한다는 빠듯한 일정이기도 하였고, 당시 우리의 기술 수준 또한 플랫폼, 섀시의 설계를 직접 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4월 19일에는 중형차 개발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포드의 것은 배제하기로 하고 미쓰비시와의 협상도 여의치 않 아 대안으로 르노의 플랫폼을 이용할 방안을 찾기 위한 르노와의 회의기록도 남아있다. 이후 르노 중형차 패키지 레이아웃의 블루 프린트를 받아서 잠시나마 검토했 \었지만 바로 결렬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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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의 가지치기 모델인 3도어와, 쿠페, 픽업, 왜건의 수출 사양도 이 시기에 확정되었다. 수출 모델이 결정되자 조립공장 확장 작업이 필요했다. 당시 5만 6천대의 생산량을 10만대로 확장하는 공사를 위해 1979년 1월 19일부터 10일간 공장을 셧 다운(Shut down)했다는 기록이 노트에 남아있다. 오늘날에도 2~3개월은 족히 걸리는 일을 당시에 주문이 밀린 차를 생산해가면서 10일만에 해냈던 것이다.

한 편으로는 미국 수출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미국의 연비측정 기준이나 배기가스 측정기준이 유럽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조사 및 준비가 필요했다. EEC와 캘리포니아의 법규를 비교, 분석하고 1980~1981년에 법규가 어떻게 변화할 지에 대한 대응책도 찾아내야 했다. 미국 수출을 위해서 앞 유리를 유럽과 달리 두 겹짜리로 해야 한다는 등의 세부적인 사실도 하나하나 숙지해 나갔다. 까다로운 미국 시장에 앞서 캐나다에 먼저 수출하기로 결정했으나, 캐나다 역시 미국과 같은 규제를 사용했기에 그에 따른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호주와 캐나다는 미국의 규제를 따르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하고 있는 국가는 독일, 일본뿐이었고, 일본의 도요타도 1950년대 수출을 시작했지만, 까다로운 미국 시장에서 고전하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수출을 시작한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 시장은 신중하게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대한 준비로 우선 캐나다 현지 조사팀을 구성했다.

유럽시장에서는 네덜란드에 가장 먼저 수출을 시작했다. 이미 미국이나 유럽을 제외하고 국가별로 법규가 없거나 한국보다 까다롭지 않은 국가들에는 구석구석 수출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는 벨기에에 51개, 네덜란드에 60개의 딜러가 있었는데, 이를 각각 100개씩으로 늘리자는 정세영 사장 주재 수출 확대회의의 기록도 노트에 적혀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를 포함한 북유럽 3국까지 포함한 수출계획은, 수출 확대로 일정규모를 넘기지 않으면 자동차회사의 존립이 불가하다는 위기감 속에 진행되었고, 같은 이유로 미국 진출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내수시장에서도 업체들과의 경쟁을 치러 나가야 했다. 당시 내수 시장의 경쟁사였던 기아자동차가 고급차에 피아트 132모델을 1,600대 수입하여 판매하고 있었고, 푸조의 모델도 수입을 허가 받아 판매를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포드로부터 조립 판매하던 코티나나 고급차에 해당하는 그라나다도 생산하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그라나다의 상품성 제고 작업을 준비해야 했다. 한 예로, 그라나다의 루프에 비닐 탑을 씌워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한 때에는 루프에 까만비닐을 씌운 것이 고급자동차의 사양으로 여겨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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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를 출시한지 3년이 지나며 해야 할 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가지치기 모델의 개발 외에도 중형차를 개발해야 했고, 수출시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문제점도 해결해야 했었다. 인원과 조직도 그에 맞추어 팽창해야 했지만 경험자를 찾을 수가 없었던 터라 신입사원을 채용해야만 했었다. 스타일링 디자인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해 S대 및 H대 미대 산업디자인 전공의 대리급 직원도 채용했다. 스타일링 디자인을 언젠가는 우리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4월 중순에는 엔진 설계 연구부가 출범 했다. 상당히 빠른 결정들이 연이어졌다. 경영층도 시장 확대요구나 수출시장 증대라는 절대 절명의 특명을 수행하기 위해 즉각적인 의사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이 1981년 마북리 연구소를 만들게 된 기초가 되었다.

신입 사원들은 서울을 포함하여 전국 각 지역으로부터 채용했는데, 입사 후 결혼 문제나 열악한 환경의 울산 생활을 기피하여 서울에 위치한 기아자동차나 대우자동차(새한자동차)에 스카우트 되어 가는 경우가 많았다. 입사해서 2~3년 일을 가르쳐 쓸 만 하게 되면 옮겨가는 이탈자들이 계속해서 늘어나 산적해 가는 일을 풀어가기에 인력이 너무 부족했다. 나도 입사 후 울산 현지 공장 생활을 3년 한 후, 서울 본사에 잠시 올라왔고, 포니 프로젝트를 위해 바로 이탈리아 파견근무를 하다 다시 울산으로 내려갔던 터였다. 당시 나에겐 만들어야 하는 차와 만들어낸 차들이 쏟아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만 머리 속에 가득하여 울산과 서울을 따질 경황이 없었지만, 신입사원들의 생각은 나와는 약간 달랐던 것이다.

3월 27일에는 이런 문제로 새한자동차를 방문했던 기록이 있다. 울산 사람들을 너무 적극적으로 뽑아가는 것을 삼가 달라는 신사협정 겸 통사정을 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대우자동차 설계사무실을 직접 찾아가 현대에서 옮겨 간 이들과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어 가면서 사무실을 돌아보았다. 새한자동차에 새 둥지를 튼 사람들이 울산에 있는 자신의 측근들을 유혹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로는 확실히 이탈해가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 들었다.

그 해 5월, 포니 쿠페와 3도어 모델의 프로토타입의 제작 계획이 착수되는 등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국내 시장에서의 포니 픽업과 왜건의 품질 문제가 대두되었다. 신차개발보다는 출시된 차의 품질 문제 해결이 우선이었다. 돌이켜보면 아주 원시적인 문제들이었지만, 당시 경험이 전혀 없는 우리와 부품회사들에게는 너무나도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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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의 아웃사이드 도어의 다이캐스팅 재질이 형편없고 링키지가 맞지 않아 당겨도 문이 잘 열리지 않고 빡빡하게 작동되며 때로는 부러지기도 했다. 시장에서 불만이 쏟아졌고 포니 아웃사이드 도어 핸들 캠페인을 2,700만원이나 되는 예산을 들여 진행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이것이 오늘날로 이야기 하면 한국 시장에서의 첫 번째 리콜캠페인 이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워터 펌프와 풀리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 품질에 대한 문제들이 헤아릴 수 없이 생겨났다.

1979년 초기에 주된 품질 문제가 3가지로 요약되어 노트에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가 배기관이 터져 배기가스가 파이프 중간에서 유출되는 문제였다. 두 번째는 쇽 업소버의 편마모, 세 번째는 에어 클리너의 노이즈였다. 이 세 가지의 문제는 꽤나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혔다. 머플러의 경우 외국 업체와 기술 및 생산 제휴를 해서 해결하였고, 에어 클리너 문제도 케이스의 프레스 진원도나 금형의 정밀도, 각 부품들의 사이즈를 맞추는데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2~3년이란 긴 시간에 걸쳐 해결하였다. 쇽 업소버의 문제는 1990년대까지 완벽히 해결되지 않아서 유럽 수출용 스쿠프에는 유럽산 작스(Sachs)제품을 달아 수출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결국은 외국 업체와 기술 및 생산 제휴를 통해 하우징과 샤프트의 재질과 정밀 가공도를 향상시켜 해결하였다. 대부분의 문제를 외국과의 제휴를 통해 기술을 향상시켜 해결한 셈이다.

앞의 세가지 이외에도 많은 품질 문제들이 여기저기에서 양상을 바꾸어가며 쏟아져 내렸다. 스티어링 휠로 인한 직진안정성 문제나 타이어 편마모 문제도 1980년 대 말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캠버와 캐스터, 토인 값이 목표 범위 안에 맞아 들어가야 하는데, 부품의 정밀도를 충분히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유사한 문제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트랜스미션 레버의 진동 문제가 제기 되었고, 와이어링 커넥터에 물이 들어가는 것도 문제였다. 유럽에서 포니의 헤드룸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이는 시트의 H 포인트가 맞지 않아 생긴 문제였다. H 포인트에 대한 인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이는 그라나다의 시트 문제 개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도 고속도로나 시내도로에서 주행 중에 휠 캡이 빠지고, 비 오는 날이나 비가 내린 뒤에는 램프에 물이 고인다던가, 차량 안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와 고인차량도 제법 되었다. 문제들에 일관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야말로 각양각색에 예측불허의 양상이었다. AS부서나 정비 팀 단독으로는 원인 분석이 어려워 문제가 발생하면 일차적으로 설계부서로 무조건 모였다. 소비자들이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셈이고 테스트 드라이빙중에 발생한 문제 해결은 기술개발팀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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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문화가 성숙되지 않아 자동차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국내 여건에서 개발 단계의 문제점 발견은 물론 피드백조차 쉽지 않았다. 1955년‘망치로 두들겨 만든’시발이 처음 나왔지만 극히 일부‘선택 받은’사람들만 탈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자동차 문화 자체를 도입해 오는 초기단계였기 때문에, 심하게 표현하면 굴러가기만 하면 자동차로 인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국내에서 우리 손으로 개발하고 생산된 차가 수입해서 조립한 차량보다 파워가 높고 내구성이 뛰어나 택시 기사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신기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는 버스도 달리다 보면 먼지가 차 안으로 들어온다던가 닫힌 출입문 사이 벌어진 틈새로 하늘이 보이는 정도는 당연한 것으로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시절에 등장한 포니는 그야말로 고급차였다. 그 동안 외국에서 들여온 조립 모델에 비해 디자인도 뛰어나고 성능도 월등히 나았다. 당시 두 번째 석유파동 때문에 에너지 절약에 대한 전국적인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이 때부터 국내시장에서 연비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브리사와 제미니 등에 비해 출력도 좋고 엔진과 미션의 내구성도 높았던 포니는 상대적으로 높은 연비까지 더해져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포니가 처음으로 진출한 에콰도르에서는 품질 문제가 전혀 제기되지 않았지만 유럽은 달랐다. 나가는 곳마다 각양각색의 문제점들이 노출되어 클레임이 끊이지 않았다. 브레이크 라이닝과 드럼에 열이 발생해 성능상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현대 모터 홀랜드(HMH)를 유럽의 창구로 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윈드노이즈 등 소음문제와 타이어의 접지력 문제는 현지에서 생산한 부품을 달고 출고를 함으로써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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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는 영국의 MIRA라는 시험대행기관에 여러 가지 엔지니어링 평가 및 내구 시험을 의뢰하기 시작하였다. 차체 진동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의뢰를 시작으로유럽제 코니(KONI) 서스펜션의 시험도 의뢰했다. 머플러가 진동하며 차체를 때리는 일도 있었고 도어를 열때 체커가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심하게 들린다던가, 스티어링 휠을 돌릴 때 나는 원인 모를 소리를 찾기도 했다. 네 바퀴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것은 다반사였다.

비가 오면 혼의 소리가 이상하게 변질되는 문제라던가, 방향지시등의 유닛이 고장나 주행하는 차마다 램프가 깜박이는 간격이 달랐다. 정세영 사장이 품질문제에 대한 종합회의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정 사장은 5~6가지의 문제를 집중 거론하며 품질문제를 본인이 직접 관장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물론 협력업체들도 이러한 문제에 속수무책이긴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시동용 스타터모터가 작동이 안 되면, 배터리 수명이 다 되어 발생한 문제인지, 아니면 알터네이터의 결함에 의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국내에도 세방전지 등의 배터리 회사가 있었지만 기술력은 일천했다. 기술력이 부족하기는 타이어회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흥아타이어를 비롯해 한국, 금호, 우성 타이어 등이 있었으나 수출 차에는 시장이 원하는 대로 굿이어나 미쉐린 타이어를 장착해 수출해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지 딜러들이 지정한 타이어를 장착해 주어야 했다. 우리에게는 타이어를 시험할 시험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산 타이어의 정확한 문제점조차 파악 할 수가 없었다. 한편 한국의 택시기사들은 협소한 시장에서 피드백의 역할을 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콘솔박스에 담배 갑 넣는 수납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등의 작고 큰 아이디어 외에도 본인이 LPG 택시를 직접 개조해서 운행하는 기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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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카 스텔라와 포니 페이스리프트 프로젝트가 착수된 6월에 눈길을 끄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이는 디젤엔진의 개발이었다. 유럽시장으로부터의 요구에 따라 포니에 장착될 엔진이었다. 유럽의 업체에 디젤엔진 개발을 의뢰한 후 코티나 마크4와 포니에 탑재하기로 결정하고 진행하였지만, 소음과 진동을 잡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엔진을 새로이 개발하는 것이 너무나도 벅찬 일이었다. 결국 디젤 엔진은 당시 상황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한국자동차공학회가 출범한 것이 이 해 7월 18일이었다. 품질에 대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고, 학회 일까지 맡아 하며, 품질문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감성 품질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1978년 수출이 시작되어 1979년에는 유럽시장에 진출했으며 에콰도르와 중동 등에도 진출하며 시장을 확대해 나가고 있던 차에 나는 11월 말 정부 주도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당시는 워낙 일에 치여 수상을 즐거워하고 했던 기억이 없지만, 지금 생각하면 뿌듯하고 또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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