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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기술 첫 걸음에서 비상까지-10. Y카 프로젝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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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0-11-17 17: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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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카 스텔라 프로젝트의 시작
한편 우리는 기술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 있던 포드와 결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형 승용차 포니에 이어서 중형 승용차를 우리 힘으로 고유모델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립 생산하던 중형차 포드 코티나플랫폼을 이용해서 고유모델 Y카 (후에 양산할때‘스텔라’라고 함)를 개발하는 Y-Car Project였다. 코티나 플랫폼에 미쓰비시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탑재하는 프로젝트였다. 미쓰비시와는 포니 베이스모델인 랜서 플랫폼만 기술제휴가 되어 있었다. 미쓰비시에서 생산중인 중형차 모델로는 갤란트(Gallant)가 있었으나 갤란트의 플랫폼은 별도로 계약을 해야 했다.

글 /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 한국자동차공학회 전회장)
출처 / 한국자동차공학회 오토저널


미쓰비시와는 포니 한 차종 기술전수를 받아 개발하는 것 자체도 진행하기에 너무 힘들고 벅찼다. 구보 회장과 정주영 회장 두 거인이 협상 테이블에서 어떤 명분을 갖고 말이 오갔는지는 베일에 가려있다. 어느 날인가 정주영 회장이 구보 회장을 만나러 일본에 다녀왔다. 두 어른이 최대한 협조하는 것으로 합의한 메모를 갖고 돌아 왔다고 전해졌다. 이 메모를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국의 포드나 독일 회사로부터 거절을 받아 오던 터에 거의 막다른 골목 끝자락에서 거둬 낸 지푸라기였다. 하지만 실무선에서 작성된 미쓰비시와 기술제휴 계약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일방적이었다.

그들이 유럽이나 미국으로부터 자동차 기술을 배워올 때 받았던 설움에 대한 분풀이였을까? 포니 개발이 진행하는 과정에는 미쓰비시는 자동차 회사뿐 아니라 미쓰비시 그룹까지 총 동원하여 감시자(감시견이라는게 오히려 나을 것 같다)들이 철저하게 기술 이전 내용을 주의 깊게 감시하고 있었다. 일거수일투족을 돈으로 보상해야 했다. 돈을 줘도 설계실 견학마저도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미쓰비시를 방문해도 본관 건물 회의실과 화장실까지로만 행동반경이 제한되었다. 포니 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도 장벽이 너무 높았다. 베를린 장벽이 이렇게 높았을까? 거기에 중형차 프로젝트를
추가하자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 사항으로 여기지는 것은 당연한 분위기였다. 양사간에 감히 기술제휴를 추가하자는 생각 자체를 경영층이나 실무선 어느 쪽에서도 입 밖에 꺼내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 유럽의 그리스 딜러로부터 포니 픽업을 3/4톤과 1톤으로 하중을 늘려서 개발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우리는 요청이 있으면 무조건 해야 되는 줄 알고 일을 추진했다. 어떤 일이든지 주어지면 해결해야 만했던것이다.‘ No’라는말은정주영회장의‘불가능은 없다’라던가“너 해 봤어?”라던가 하는‘Can Do Spirit’정신에 위배되었다. 무슨 일이던 자동차에 관한한‘항상 솔루션은 있다’고 생각하고 추진해온 내 성격 탓도 있다. 게다가 실제로 또 하면 다 되었다. 그리고 재미가 있었고 시간이 항상 부족할 뿐이었다.

한편 같은 해 8월 말에는 내장 개선에 관한 이야기가 대두됐다. 라디오나 룸 램프의 스위치는 촉감이 부드럽지 못했다. 히터 에어컨 스위치나 도어 레귤레이터 핸들은 뻑뻑하거나 중간에 걸림감이 있었다. 선바이저는 처음에는 뻑뻑하다가 얼마 안가서 헐거워졌고, 재떨이를 열고 닫는 것도 뻑뻑하고 조작이 부드럽지 않았다.

인스트루먼트 패널의 스위치 촉감을 비롯, 부품의 색상이나 광택도를 통일하고 선진국 차들과 비교해서 촌티를 벗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내용이었다. 내장컬러를 검정색으로 지정해 주었지만 검정색도 여러 색으로 통일감이 없었고 사출품은 재료에 따라 광택도(Gloss)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마스터가 되는 컬러 샘플을 지정해 주고 광택도를 관리하기 시작했지만 다양한 납품처에서 들어오는 모든 부품을 쉽게 맞출 수가 없었다.

해외에서 만들어 오는 부품들도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선진 유럽의 이태리나 프랑스 고객들은 독일이나 자국 생산차들과 비교해서 너무 촌스러웠을 게다. 디자인 자체는 이태리에서 해 온 덕분에 촌 티를 벗었지만 부품을 만들어 내는 업체들은 어딘가 시골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장 부품뿐 아니라 외장부품들도 다를 바 없었다. 프론트 엔드 몰딩을 비롯해 드립 레일 몰딩 등의 각종 몰딩류들은 스테인레스 부품들이었지만 광택이나 색깔이 달랐다. 수준 이하였고 국제 경쟁을 갖기 위해서는 세련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부품들을 설계하거나 만들거나 조립하는 주체는 자동차를 처음 대해 보는 한국사람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바로 3~4년 뒤에 북미시장에 도전했던 셈이고, 캐나다에 공장을 짓기로 결정한 것이다. 미국시장에서 자동차 문화 문명과의 충돌은 불가피 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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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에이터 그릴과 스티어링휠을 포함한 모든 감성품질 개선 프로젝트도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다. 타이어 수준도 한 단계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남미와 아프리카 같은 개발도상국에는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타이어를 장착하고 나갔지만 유럽시장이나 북미시장에는 미쉐린과 굿이어 등 유명 브랜드를 사용해야 했다. 중동시장에서 제기된 에어컨 문제도 확실하게 개선하기로 했다. 히터나 에어컨의 바람 통로나 노즐에서 발생하는 소음 문제도 개선해야 했다. 에어컨은 일본의 클라리온사 외에도 디젤키키사를 추가해서 개발을 진행했다.

이렇게 시작된 내장 개선 프로젝트는 포니라는 첫 고유모델의 촌티를 벗어보자는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내장부품이뿐만 아니라 타이어를 포함한 외장부품을 망라한 자동차라는 상품의 업그레이드 프로젝트였다. 자동차 기술개발에서 첫 발을 내딛기 시작한 한국자동차 산업과 문화를 업그레이드시키는 프로젝트였다. 한국자동차 부품이나 완성품을 생산하는 회사나 종사자들이 촌티를 벗어야 국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자동차 문화 개선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미국에 1986년도 포니 엑셀이 진출한 뒤 19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1단계가 끝났다. 자동차라는 상품의 개선 프로젝트야말로 자동차가 존속하는 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사항인 것이다.

부품업체의 품질 도약이 없이는 선진국에서 상품 경쟁력은 너무 격차가 크기만 했다. 한국이라는 국격과 한국산 자동차라는 상품으로서의 품격을 처음으로 유럽 시장에서 선을 보이고 피드백을 받아 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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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는 미쓰비시 구보 회장의“현대자동차는 자동차라는 상품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면서 자동차 생산을 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았던 것이다. 에콰도르를 포함한 남미시장이나 중동 및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들 뿐 아니라 유럽 시장까지 3년 사이에 산발적으로 수출을 강행했던 터라 짧은 기간 안에 다양한 피드백을 받았고, 이것을 계기로 새롭게 출발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자동차 부품 제작이나 상품으로써 필요한 조건과 격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단기간에 감성품질이나 선진 품질요구 수준을 동시 다발적으로 흡수 소화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쩌면 부품업체의 기술제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는지도 모르겠다.

테레사 Teresa 1400 Y카
코티나는 국내 시장에서 개선해야 할 문제점이 발생해도 도면없이 CKD 상태로 도입해서 조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선하거나 수정할 방법이 없었고, 포드에서도 응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포니를 생산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시장에서 포니와 비교해서 엔진 힘이 약하고 브레이크 시스템이 밀린다는 평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포니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중형차를 고유모델로 새롭게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포드의 코티나 플랫폼에 일본 미쓰비시의 소형차 플랫폼과 부품들을 이용한 새로운중형차스텔라개발을착수한것이다.“ 만약포드나 미쓰비시가 우리들이 비밀리에 착수한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성공 가능한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했을까?”라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포니는 출시 후 3년째가 되면서 국내 외에서 인지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반면에 영국 태생인 코니타는 품질은 물론이고 부품의 공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불만이 늘어나고 있었다. 당시만해도 영국을 중심으로 노조의 파업으로 인한 품질 저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수입되는 KD 부품 상자에서 서로 맞지않는 다른 부품이 섞여 실려 오곤 했는데, 문제 제기를 하면 노조 문제 때문이었다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었다.

선적이 늦어져서 생산에 차질을 주는 것도 노조 때문이라고 하면 천재지변과 같이 받아들여야 했다. 국내 시장에서는 독일제 레코드 로얄을 생산하고 있는 경쟁사와 비교해서 평이 좋지 못했던 점도 Y카를 새로운 플랫폼으로 개발하는 데에 촉진제로 작용했다. 이에 앞서 1979년에 코티나에 미쓰비시의 1,400cc 엔진을 탑재하기로 하고, 형식승인을 추석 전 마무리해야 했다. 당시만해도 한국에서는 1,500cc 배기량을 기준으로 자동차 세금을 부과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미쓰비시의 1,200cc와 1,400cc Saturn 엔진을 기술제휴 해서 생산 판매하고 있었다. 코티나에 영국제의 1,600cc 엔진 대신에 포니에 얹은 1,400cc 엔진을 탑재해도 좋겠다는 이야기가 시장에서 들려왔다. 바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Y카 프로젝트를시작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준 셈이었다.

이런‘짜깁기’플랫폼 개발은 포니 픽업과 왜건을 개발하면서‘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소형 1톤 트럭인 포터 플랫폼도 짜깁기 식으로 개발해 냈던 경험이 있었다. 겁나는 것이 없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국내외 60여 개국으로부터 다발적으로 끝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문제점을 해결해 왔다. 이런 경험도“한 번 해보자! 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지않은가?”라는 후발 업체의 기술자 들의 숙명적인 자존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과다한 일에 비해 인력이 턱 없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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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보면 제 2의 고유모델 개발을 해 보겠다는 용기가 무모하기 그지 없었지만 당시 상황으로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포니 문제점들은 회사존립을 위해서 해결책을 내 놓아야 했다. 포드가 고유모델을 위한 플랫폼 기술제휴를 해주지 않아서 미쓰비시와 포니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 것이 한국 자동차기술개발을 앞 당기게 된 첫 번째 선택이었고, 미쓰비시와 중형차 플랫폼 공급 계약을 하지 않았던 점이 자동차 기술개발 자립에 자신감을 실어 주는 두 번째의 막다른 골목에서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차체부분은 코티나에서 문제되었던 부분을 포니와 비교해 가면서 새롭게 보강하는 방향으로 개발을 진행해 나갔다. Y카 개발을 위한 원가계산 이야기가 거론되기 시작했고, 공정수와 재료비, 신제품 원가계산 규정을 만들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포니를 해 본 경험으로는 중형차야말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미쓰비시나 일본 부품회사들에게 지불해야 하는비용도 포니 보다 조금이라도 덜 지불할 수 있다는 생각이 기술개발자들은 물론이고 경영층에 이심전심으로 퍼져 있었다.

스티어링시스템은 TRW에, 브레이크시스템은 걸링(Girling) 등의 선진 외국 부품회사에 아웃소싱하는 식으로 플랫폼을 바꾸어 구성해 나갔다. 이렇게 자력으로 개발한 Y카의 플랫폼은 포니가 그랬듯이 영국과 일본의 부품과 생산 기술 외에 포드 20M (토너스)을 공급해 주었던 독일 포드의 기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 포드에서 가져 온 포드 20M과 영국 포드의 코티나에 일본 미쓰비시 엔진과 파워트레인 시스템을 섞어서 하나의 독자 플랫폼을 완성해 냈던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메이커의 기술을 도입해서 더 강하고 내구성 좋게 개발한 미쓰비시. 다시 우리가 미쓰비시의 장점들을 취사선택하는 짜깁기식 기술개발(Tailored Engineering)이었다.

Y카 개발 과정에서는 스티어링 복원력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주행성능에 문제도 점차 수면 위로 부상했다. 쇽 업소버 등은 독일 것을 가져다 쓰기로 결정했다. 라디오 안테나를 전동식으로 바꾼 것도 이쯤이었다. 그러자 도어 레귤레이터도 전동식으로 하고, 중앙집중식 잠금장치도 적용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카스테레오의 품질 향상도 거론되었다. 전기∙전자 장치들이 자동차에 접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쟁차인 피아트 132에 대항할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그라나다 V6 엔진을 코티나 마크5에 적용이 가능한지 검토해 보기도 했다. 또 부사장이 코티나, 마크5를 갖고 1톤급 픽업을 개발할 수 있는지 검토를 지시했다. 아이디어들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아이디어가 튀어 나오면 해봐야 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같은 해 11월 6일에는 이탈디자인에서 포니2의 디자인을 가져와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내용은 펜더는 변경하고 후드는 현재의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범퍼는 피아트 Ritmo식으로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었다. 리어 엔드 디자인은 스포일러를 적용하는 게 눈길을 끄는 내용이었다. 테일 게이트는 란치아 델타식, 인테리어의 클러스터 디자인은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타입이었다. 정세영 회장이 왜 이렇게 많이 바꾸냐고 지적했고, 판매 부서에서는 판매독려를 위해 많이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이 당시부터 풀 모델체인지 및 페이지리프트 등 모델체인지에 대한 변경범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셈이다. 우리는 포니2에서는 전기장치 품질 개선을 비롯해 연비 개선, 중량 저감 등을 달성하자고 결의했다. 한편 우리는 3도어와 픽업의 리프 스프링을 코일 스프링으로 바꾸는 작업을 2월 말까지 검토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포니 섀시 레이아웃에 손대기 시작한 것이다.

11월 중순에는 해외 시장으로 수출을 활성화하고, 회사가 글로벌화 하기 위해 영어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정세영 사장은 앞으로 전 직원이 승진하는데 영어 시험점수를 반영하겠다는 중대 선언을 발표했다. 신입사원입사 기준에도 필수자격 요건으로 추가되어서 계속 시 행되고 있다. 실제로 영어시험은 매년 전 직원을 상대로 시행되었고, 영어점수가 모자라는 사람들은 진급에 누락된 것뿐만 아니라 진급 탈락자들은 회사를 떠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Y카의 디자인이 확정됐다. 정주영 회장은 Y카 프로토타입을 서둘러 제작하라고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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