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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기술 첫 걸음에서 비상까지-14.X-카 포니 엑셀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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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2-01-21 00: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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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카 포니 엑셀 프로젝트-1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의 자동차 산업에서 조차 1985년 2월에 생산을 시작한 현대자동차의‘포니 엑셀’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국내 런칭 후, 이듬해 곧바로 미국에 수출을 시작했는데 첫해 수출 판매 물량이 무려 27만대에 달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그것도 자동차 산업의 격전지인 미국 시장에서의 대량 판매라는 점과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아주 생소했을‘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국가 브랜드와‘현대자동차’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브랜드를 달고 말이다.

글 /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
출처 / 한국자동차공학회 오토저널

자동차 산업은 19세기말 유럽에서 내연기관 차량이 발명되면서 현재의 자동차 형태가 시작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서 미국 포드의 대량생산 성공에 의해 미국시장에서 급속히 발전을 하게 되면서 현대 산업 문명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미국이라는 거대한 소비시장이 치열한 자동차의 격전장이 되었다.

현재 미국 시장에서 살아 남아 있는 자동차 메이커들은 북미 빅-3인 지엠, 포드, 크라이슬러와 독일, 일본 회사들 외에는 한국의 현대∙기아자동차가 전부인 셈이다. 스웨덴의 사브, 볼보와 영국의 재규어, 랜드로버가 극히 소량 판매되고 있으면서 옛 자동차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있을 뿐이다. 프랑스, 이태리 등 독일 이외의 유럽 메이커들이 미국 시장에 들어가려고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번번히 미국시장 입성에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이와 같이 시장 진입조차 까다로운 미국을 그 이름도 생소한 한국의‘현대자동차가 어떻게 성공적으로미국에 진출하게 되었을까?’라는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우리나라의 최초미국 수출차량인 X-카(포니 엑셀) 개발에 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도록 하겠다.

1979년, 유럽시장에 이미 진출해 있었던 현대자동차는 내부적으로 미국 시장에도 수출을 준비해야겠다는 의견이 곧 바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1982년부터 포니-2를 캐나다 시장에 수출하기로 결정해서 진행하고 있었고, 이것은 캐나다에 인접한 미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던 것이다.

미국 시장은 당시 단일 국가로서 가장 큰 시장이었고 또한 미국에서의 성공은 곧 글로벌 메이커로서의 성공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이태리나 프랑스 메이커들도 시도했다가 고배를 마시고 철수해야만 했던 경험들이 잘 말해주듯 그리 간단한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플랫폼부터 다시 검토해야만 했다.

그해 말에(포니라는 자동차를 처음 생산 시작한지 겨우 3년 반이 지난 뒤였다) 우리는 뒷바퀴 굴림 방식이었던 포니를 가지고 미국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상품경쟁력 측면에서 곤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바퀴 굴림 방식의 차량으로 새롭게 개발해야겠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포니 생산을 처음 시작하고 나서 1년 뒤 유럽시장에 수출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독일의 폭스바겐이나 아우디 뿐만 아니라 일본메이커들도 대부분 앞바퀴 굴림 방식으로 바꿔가고 있었다. 앞바퀴 굴림 방식은 프로펠러 샤프트와 리어 액슬이 필요 없기 때문에 소음진동 측면 뿐만 아니라 차량의 중량, 연비 등에서 상당히 유리하고 플로어의 터널 높이와 리어 시트를 낮출 수가 있어 후석 승객의 거주성이 상당히 좋아진다. 하지만, 새롭게 바뀌는 횡치엔진탑재 방식과 전륜의 추가적인 구동장치 등에 의해
엔진룸 부분이 상당히 복잡해지는 등 한 수 높은 기술이었다. 1950년대에 이러한 장점들 때문에 이태리의 자동차 메이커인 란치아를 중심으로 전륜구동형 자동차의 개발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당시 기술 수준으로써는 정밀한 부품들을 완벽하게 가공하는 것이 곤란하여 포기하고 있었는데 다시금 소형차들이 이 쪽으로 이미 추세가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우리만 몰랐던 것이다.

미쓰비시로부터 포니용 뒷바퀴 굴림 방식 플랫폼을 비싼 돈을 들여 도입할 때 일본 및 유럽의 선진 메이커들은 앞바퀴 굴림 방식의 차량을 이미 개발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급변하고 있던 시장과 기술 변화 움직임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니를 생산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 엔진, 변속기 및 구동장치등 모든 생산 시설을 앞바퀴 굴림 방식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투자해야 한다는 중대한 결심이 필요했다.

이미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 포니의 뒷바퀴 굴림 방식 설비는 그대로 유지한 채 새롭게 개발되는 X-카의 앞바퀴 굴림 방식을 위한 생산 설비 투자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포니용 엔진이나 변속기의 투자 집행이 거의 완료된 다음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우리가 후륜구동방식의 포니 플랫폼을 도입해서 이제 막 판매를 시작하고 있을 때 이미 미쓰비시에서는‘미라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앞바퀴 굴림방식의 소형차를 이미 개발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고 그러한 것들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원통한 현실이었다. 그들로서는 알려줄 책임이나 의무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구형이지만 후륜구동방식의 포니 플랫폼이나마 기술 공여해준 미쓰비시가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세계시장의 기술 개발 방향이나 추세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뛰어 들었던 우리의 무지의 소치였을 뿐이다.

또한 이미 생산을 하고 있던 후륜구동방식의 포니는 1979년 말에 이미 44개국에 수출하고 있었던 터인데다가 생산량을 좀 더 늘려야만 했다. 이러한 것은 지금 생각했을 때 느끼는 안타까움이라는 생각이지 당시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새로운 학습 과목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포니를 개발하여 몇 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모든 생산 시설을 새롭게 추가 하거나 바꿔야 한다는 뼈저린 결정을 하면서 상품기획의 중요성에 대한 반면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방향전환에 따른 소요비용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현대자동차의 초창기 경영진들의 가슴속 깊이 자책감이 각인되고 새겨지기 시작하
는 순간이었다.

사람과 원숭이의 닮은 점은 뼈저린 실수를 다시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라 했던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학습효과였다. 그 이후 우리의 모든 상품기획은 세계 곳곳으로부터 최신 정보를 수집해 가면서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게 결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4년 후부터 규모는 작더라도 미국, 유럽과 일본에 해외연구소의 설립이 발 빠르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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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바퀴 굴림 방식에 대한 우리의 기술적인 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다. 포니와 포니의 가지치기 모델인 왜건과 픽업 그리고 소형상용 차량인 1톤 트럭(HD1000)이 그동안 우리의 차량개발 경험의 전부였는데 이들은 모두 뒷바퀴 굴림 방식의 차량이었던 것이다. 또한 포드로부터 부품을 공급받아 가면서 조립했던 코티나와 그라나다 역시 뒷바퀴 굴림 방식의 차량이었다. 선진업체로부터 앞바퀴 굴림 방식의 차량에 대한 기술적인 도움 없이는 미국 수출용으로 계획했던 X-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미쓰비시를 다시 찾아가 기술구걸을 하게 된 것이다. 엄청난 돈을 주면서도 신기술도입 협상이야말로 치밀한 전략적 접근과 설득력 있는 기술이 필요한 법이다. 겉으로는 기술 도입이라는 명목하에 머리를 굴리는 협상이었지만 기술자의 가슴에는 그냥 구걸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필자는 1981년초 소형설계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 시점은 포니-2의 개발뿐만 아니라 X-카와 동시에 개발 진행이 되었던 Y-카(스텔라) 프로젝트 등으로 동경, 교토, 오카자키 등 일본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나의 노트에는 당시 5월, 미국 수출용 X-카 프로젝트를 위해 일본 미쓰비시가 있는 오카자키를 방문하여 전륜구동형 차량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협의를 했던 기록이 있다. 당시 미쓰비시는 전륜구동형 소형차인‘미라쥬 콜트’라는 차를 가지고 있었다. 미쓰비시는 1978년 1세대‘미라쥬’를 출시하고 2세대 미라쥬(1983년 출시)를 한참 준비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미쓰비시의 전륜구동형 엔진과 변속기를 포함한 섀시플랫폼을 한 번 더 도입하기로 결정을 하고 X-카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결정이었다. 기술도입을 할 때도 기술 내용을 얼마나 깊이 있게 아는가에 따라서 도입해 오는 기술의 양과 깊이가 결정되는 법인데 우리는 너무 몰랐다. 그래서 X-카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후 정확하게 10년 뒤에 또 한번의 엄청난 재투자를 하게 되고 미국시장에서 고전을 하게 된다.

X-카는 3도어, 4도어, 5도어의 LHD(좌측 핸들), RHD(우측 핸들), 택시 LPG, EEC(유럽), 캐나다, 미국사양을 동시에 개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선진자동차경쟁사들이 생산하고 있는 차종들은 다 구색을 갖추어야만 했다. 무식한 판매 책임자의 엄청난 과욕이었다.

겨우 걸음마 할 줄 아는 손주 녀석이 뒤뚱뒤뚱 거리면서 뛰려다가 넘어지는 것과 뭐가 다를까? 넘어져서 코가 깨지더라도 또 뛴다. X-카가 개발되어 미국시장에 진출해서 뼈가 깨져서 그야말로 뼈에 사무치게 실패를 한 뒤에도 몰랐었다. 이제 이렇게 정리를 하면서 돌이켜 보니까 과욕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뿐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하나만 낳아서 제대로 걸음마부터 철저하게 가르치도록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대신 중국은 오래 걸리고 우리 한국은 무모한 도전 덕분에 빨리 성장해 온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포니에 있었던 픽업과 왜건은 생산 능력 및 차종 단순화 차원에서 X-카에서는 단종하기로 결정했다. 영업부문에서는 픽업과 왜건마저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까다로운 미국 사양을 제대로 개발하기 위해 차종을 축소하여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고 5도어가 있으니까 왜건을 대체하자는 의견으로 겨우 설득했다. 그동안 내수나 수출담당 판매부서에서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X-카를 개발할 때부터는 산더미 같이 쌓인 일들을 해결해 나가려면 일을 줄여야했다. 포니의 수출 준비, Y-카 프로젝트, 울산 프루빙그라운드의 가동 등 여느 때 보다 굵직굵직한 일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초기 상품기획부터 디자인, 설계, 시작, 시험 등 나름대로의 프로세스를 정하여 구체적인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신차개발을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직과 사람들이 조금씩 학습효과 덕분에 철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미쓰비시 본사를 다시 찾아갔다. X-카 프로젝트에 대한 개발 개념을 우리 나름대로 결정하여 미쓰비시 측과 구체적으로 협의를 시작한 것이다. X-카는미국과 구라파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차량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전륜구동방식을 채용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지만 기술도입을 위해 미쓰비시 경영진을 설득해야 했다. 포니는 자가용 외에도 택시, 픽업과 왜건을 통해 국내 오프로드에서도 성능이 우수한 차종으로 성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X-카를 전륜구동형으로 진행하는 것에 대한 논리적인 이해와 설득이 필요했다.

한국의 후발업체가 왜 일본의 4위 업체인 미쓰비시와 나란히 동일한 신기술의 X-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가? 빠른 속도로 커가면서 따라오는 성장속도를 보면서 현대자동차가 미쓰비시를 추월할 것을 예리하게 간파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차량의 기본 뼈대인 X-카 플랫폼은 미쓰비시에서 제공 받기로 했다. X-카 설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미쓰비시는 일본 내에서 판매를 하고 있던‘미라쥬콜트’를 개선하여 82년형으로 3개월 후에 발표할 예정이었는데 단종되는 구형모델의 섀시를 우리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또한 미라쥬의 뉴모델은 그 해 9월 동경모터쇼에 출품되어 다음 해에 출시될 예정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엔진은 오리온 엔진인 4G11(1.3리터), 4G12(1.5리터), 변속기는 KM160, KM165, 섀시는 NE454 등이었다. 차량중량에 대해서도 미라쥬는 760kg인데 반해 X-카는 30kg 정도 더 증대될 것 같다는 설명도 있었다. 당시 한국에는 고장력 강판이 없어 더 무거워질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M이라는 엔지니어는 미국 사양은 환경청(EPA) 테스트 시에 중량이 아주 중요할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는데, 별 생각 없이 내뱉은 얘기였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사소한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배워나가야 했다. 사람이나 조직의 공통점은 잘하지 못해서 깨지고 법이고 잘못한 원인을 느끼고 뉘우치면서 다시 배우는 것이다. 자신이 모르면서도 성장해 가는 학습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되풀이 해가는 것이 사람과 조직의 공통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조직을 사람과 같은 유기체로 간주하는 모양이다. 포니, 스텔라에 이어서 세 번째의 학습과목으로 X-카가 이렇게 결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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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럽시장에서 받은 영향으로 5도어 해치백을 기본으로 하여 택시도 개발할 계획이었다.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따라 택시에 LPG 사양 개발이 필요했으나 LPG의 폭발 문제 및 가스의 실내유입 가능성 때문에 5도어에서는 LPG를 개발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X-카가 생산되어도 이미 택시 시장에서 인기가 있었던 포니는 1986년까지 병행 생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편, 현대자동차에서 시급히 필요했던 프루빙 그라운드의 건설은 미쓰비시가 아닌 영국 마이라(MIRA)의 도움으로 추진되었다. X-카에서는 전륜구동의 핵심부품인 CV조인트(등속 조인트)를 개발해야 하는데 이는 불란서 시트로엥의 특허였다. 프론트 서스펜션의 스프링 옵셋 관련 사항은 BMW의 특허를 도입해서 사용해야 했다. 1984년부터는 이 특허가 소멸된다는 설명도 미쓰비시로부터 추가로 들었다. 또한 스티어링 휠은 도요타 합성(고세이)의 특허였다. 특별한 부품이나 기술에는 특허료가 별도로 지불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특허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따지면서 배우게 된 것이다.

다음 날 미쓰비시의 사장단과 현대 사장단의 최종 면담이 있었다. 나중에 미쓰비시의 사장과 회장까지 지낸바 있는 나까무라와 같은 고위급 인사들과 각부문의 책임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X-카 진행방법에 대한 협의를 마무리 한 셈이다. 그 자리에서 특별하게 부탁할 것이 있으면 해보라는 허락을 받고 용기를 내서 미쓰비시 기술센터 소속의 엔지니어를 한 번만이라도 한국에 파견해 달라는 애절한 요청을 해보았다. KD 오퍼레이션팀과 부품 수출팀 중에서 어느 한 곳을 선정해 주겠다는 답만 들었다. 결국 X-카를 진행하는 동안 엔지니어는 창구에도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자존심을 버려가면서까지 간곡하게 부탁을 한 사항이었지만 미쓰비시는 철저하게 기술센터 사람들의 접촉을 끝까지 차단했다. 기술센터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기술 유출 우려 때문이었던 것이고,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았고 갈증에 굶주려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X-카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반면에 요즈음 중국이나 인도 등지에 한국자동차 회사들을 연구소 포함해서 통째로 헐 값에 팔아 넘기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 없다. 첫 번째 고유 모델 포니에 이어 새로운 모델을 개발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고유모델 스텔라는 이미 진행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세 번째인 X-카는 스텔라와 동시에 진행되는 셈이었다. 그 중에서도 X-카는 기존 포니 보다는 한 단계 확실히 도약 발전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X-카는 미국시장에도 수출해야 한다는 목표가 확고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부담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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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쓰비시 관계자들을 울산으로 여러 차례 초청했다. 1982년 8월초, 미쓰비시에서는 생산기술 본부장인 오쿠다 상무를 비롯해 생산기술 금형과장 가토, 설계 엔지니어 다키자와 차장, 차체 설계 담당 하라다 차장 등 담당 팀장급들이 처음 울산을 찾았다. X-카의 도어를 풀도어(도어 전체를 하나의 패널로 만든 것)로 할 것인지 프레임 도어(도어 글라스 주변을 별도의 프레임으로 만들어 도어 패널과 용접)로 할 것인지에 대해 최종 결정하기 위한 초청이었다. 그들은 우선 포니의 생산 공장을 돌아보았다. 우리의 현장과 실력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다음 날, 미쓰비시는 현대자동차의 실력으로는 풀도어로 진행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필자는 풀도어가 깔끔해 보이고 그렇게 해야 도요타나 혼다와 차별화가 될 것 같아서 풀도어로 하겠다고 마음을 이미 굳히고 있었다.

당시 생산 본부장이었던 장낙용 부사장은 유일하게 격론을 거치면서 개발 방향을 한 번씩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나에게 도움을 많이 준 분이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윗사람들에게는‘장돌뱅이’, 아랫사람들에게는‘장바우’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른말을 잘하고 계산이 정확하며 사태 파악을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바우’처럼 외골수로 밀어 부치고 막무가내다. 그런데다가 정세영 회장의 신임도 두터웠다. 그런 그가 풀도어를 가장 많이 반대하고 나섰다. 고도의 금형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당시 해외 메이커들도 풀도어를 채택하고 있는 예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일본의 도요타, 닛산, 혼다에서도 최고급차에서만 풀도어를 적용했고 대부분의 차는 프레임 도어를 채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풀도어로 하면 훨씬 매끈한 외형을 뽐낼 수가 있었다. 나는 비록 생산은 어렵지만 외관이 우수한 풀도어로 진행하고 싶은 욕심에 강력하게 밀어 붙였고 장부사장은 왜 무리하려 하느냐며 강력하게 반대를 했던 것이다. 필자는 후발업체로서 존재감을 높이고 국제 모터쇼에 출품하기 위해서는 어딘가 한 구석이라도 동급 경쟁차들 보다는 앞선 구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현대자동차의 멘토이자 형님격(?)이었던 미쓰비시도 현대자동차는 하지 못한다는 의견을 내놓기까지 했다. 우리 회사 내에 반대하는 입장은 충분히 이해도 갔고 설득력이 있었다. 뒷바퀴 굴림방식인 포니에서 앞바퀴 굴림방식으로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생산기술 측면에서는 엔진 라인도 바꿔야 하는 등 별도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아 부담이 많았던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공개적인 좌석에서 장낙용 부사장과 나는 여러 차례 격론을 심하게 벌였다. 나는 새로운 모델을 개발할 때에 작은 것 하나만이라도 도요타나 혼다보다 더 좋게 하거나 그들보다 앞선 기술을 빨리 적용하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런 예로 포니-2에서 GE와 함께 플라스틱 범퍼를 혼다보다도 빨리 개발해서 적용했었다.

후일담이지만 그 때에는 현재 GE그룹의 회장인 이멜트가 담당자였는데, 나의 가상한 용기를 믿고 적극 지원해주었다. 나중에는 시간이 모자라서 미국에서 GE 비용으로 범퍼 금형을 공수해주면서까지 하면서 결국 시간을 맞춰 주었다. GE 재료를 써주었던 덕에 감사패를 주는 자리에서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 짧은 기간에 굳이 플라스틱으로 개발하려 했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자기들도
시간 맞추랴 고생했었다고 오히려 불평을 털어 놓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거의 대부분의 차들은 쉽게 플라스틱 범퍼를 채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도 개발담당 자재본부장은 불만이 엄청 컸었던 것을 기억한다. 무엇보다 풀도어로 해놓으면 외관 스타일링이 깔끔하다는 주장을 강하게 했다. 나는 후륜 구동에서 전륜구동으로 가는 것만큼이나 차의 디자인 품격, 조립, 부품 기술을 한 단계 끌어 올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장부사장은 품질문제와 투자 및 재료비 상승문제를 들고 끝까지 불가능하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정세영 회장도 초기에는 반대 의견을 피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후, 정세영 회장을 모시고 이 문제로만 세 번의 회의를 가진 바있다. 정세영 회장은 다른 건으로도 장낙용 부사장과 내가 의견이 대립되면 격론을 부치고 중간에서 서로의 의견을 적절히 살리면서 끝까지 듣는 기회를 여러 번 가졌다. 열띤 격론 끝에 결국은 풀도어로 결정해 주었다. 이는 아주 중대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양산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겪기도 했다. 디자인 측면에서의 자유도가 높았기 때문에 풀도어를 주장했었지만 나는 좀 더 어려운 것에 도전해 보고도 싶었다. 그럴 때마다 한 단계씩 크게 회사나 조직이 커가기 마련이다.

풀도어로 진행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도요타의 소아라를 비롯하여 미쓰비시 미라쥬, 혼다 프렐류드, 아우디 80, 르노 9 등 전 세계 인기리에 팔리고 있던 많은 모델들에 대해 도어 타입 분석도 세밀하게 착수했다.

나는 평소에 자동차의 품질과 품격은 도어를 열고 닫아보면 느껴지는 감성적인 느낌에 의해 크게 판단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생산 라인에서 갓나온 차들도 도어를 열었다가 닫아 보면 조립 품질에 따라서 미세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관련 부품의 품질들이 종합적으로 잘 맞아 들어가야 하고 균일해야 한다. 그래서 어느 자동차든지 도어를 열고 닫아 보면 열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감각적으로 형님 혹은 아우가 결정되는 법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포니의 도어는 프레임타입 도어인데 도어 개폐는 경쟁차와 비교해서 가장 뒤처져 있었다. 게다가 잘 안 닫히거나 하면 자재부서나 생산 기술팀에서는 설계 문제라고 설계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생산기술 총책인 장낙용 부사장은 설계부터 바꾸자고 항상 주장하는 선봉자가 되어 있었다. X-카가 풀도어로 결정이 되고 한참 뒤에 양산 부품들이 개발되어 라인에서 생산이 진행되었다. 도어 개폐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장부사장과 크게 다투었는데 그것도 종업원들이 지켜보는 라인 현장에서였다. 어느 차인가에서 빼어 낸 도어 웨더 스트립을 땅바닥에 집어 던져버리면서까지 잘잘못을 주장하는 원시적인 격론을 벌린 일도 있었다. 당시 장낙용 부사장은 44세였고 나는 36세였으므로 나는 크게 무례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분명 상사인데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도어 단차와 개폐를 타협해야 했기 때문에 생산 기술수준이나 부품 품질수준은 크게 점프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서 현대자동차의 기술발전에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우여곡절 끝에 X-카의 스타일링은 포니, 스텔라 개발에 이어서 다시 한번 더 이탈디자인의 주지아로에게 풀도어로 의뢰했다. 마침내 1982년 6월초, X-카의 노치백 프리젠테이션 모델이 이탈리아로부터 도착했다. 8월 중순에는 X-카 해치백 프리젠테이션 모델이 풀도어로 매끈하게 제작되어 도착하였다. 윈드실드 글라스를 다이렉트 글레이징(접착식 앞유리창)으로 결정했다.

그 해 7월 중순, X-카 품평 결과 수정해야 할 사항은 앞뒤 범퍼, A-필라를 포함해 총 12가지였다. 우리는 곧 바로 모델 수정작업에 들어갔다. 국내 업체 중에서 기술적으로 신뢰가 가지 않는 부품들은 일본 업체로 결정했고 개발 초기부터 외국업체와 직접 협의를 시작했다. 이는 기술 독립이 완성차 메이커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부품업체육성의 필요성과 중요 부품들에 대한 장기 국산화 개발방향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이나 유럽 부품업체들과 개발을 시작하면서 항상 한국의 장래 파트너를 결정해 가는 것이다. 파트너가 없을 경우에는 그들이 직접 투자해서 한국에 제조 회사를 설립하도록 유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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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10월에는 X-카 개발 계획을 확정했다. 우선 1985년 4월에 EEC(유럽) 지역에 수출하고 85년 12월미국에 처음으로 수출하기로 확정했다. 당시 신차의 개발과 출시 과정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선 국내 출시일정을 잡는다. 그리고 나서 3개월 후에 중동, 남미 등 과 같이 규제가 까다롭지 않은 일반 지역수출시장을 확정한다. 다시 3개월 후에 유럽으로 수출한다는 순서였다. 하지만 처음 진출하는 미국 시장은 유럽 법규 테스트(EEC, ECE)를 완료하고 4월부터 유럽 수출한 후 8개월 간 별도로 미국 법규시험들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의 기간 차이도 당시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 때 우리가 배운 것 중의 하나가 이어 모델(Year Model)에 대한 것이다. 연말까지 준비해 새해가 되어 출시하면 그것이 이어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9월에 새로운 모델들이 시장에 나오는 시기였다. 그만큼 문화도 다르고 시장도 다른 지역과 많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X-카는 신차니까 당연히 1986년초에 미국시장에 출시하는 것으로 계획한 것이고 그럴수 밖에 없었다. 모델을 승인 한 뒤 3년 만에 미국시장에까지 진출하는 야무지지만 아주 빡빡한 일정이었다.

우리는 적은 인력으로 Y-카를 한창 개발하고 있는 시기에 X-카를 동시에 개발해야 했다. 하지만, X-카프로젝트는 주먹구구식으로 처음 개발했던 포니 때와는 조금은 다르게 뭔가 초기 단계부터 나름대로는 계획적이고 부문별 목표를 그려가면서 진행했다. 우리는 포니로 캐나다 시장에 먼저 들어가 성공을 한 셈이었고 그 경험을 토대로 하여 X-카로 미국시장에서 성공할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국 시장에서‘포니 엑셀 신화’를 일구어낸 X-카 프로젝트는 우리들의 밤낮없는 노력으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화나 신기록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라는 것을 미국시장에 X-카를 출시한 바로 뒤에 바로 우리가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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