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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영국 모터스포츠의 낭만적인 시대 풍미한 팀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5-09-25 12:17:10

본문

F1 레이싱팀 ‘헤스키스’를 창단한 영국의 명문 출신 알렉산더 헤스키스 경은 실력 이상으로 화려한 행적을 남긴 활동가였다.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화려한 일생을 살며 아낌없이 돈을 쓴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언제나 열렬한 모터스포츠 매니아였던 헤스키스는 1970년대 F3에서 활약한 엔터니 버블즈 호슬리의 친구였다. 그러나 호슬리는 F3계에서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드라이버로, 당시 영국의 모터스포츠계에서는 제임스 헌트가 혼자 명성을 얻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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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마치팀에서 F1에 데뷔한 헌트는 매우 빠른 드라이버였지만 운이 없었다. 때마침 막스 모즐리와 사이가 틀어진 헌트는 워크스팀 마치에서 쫓겨나 갈 곳을 찾고 있었다. 그때 벨기에의 진흙탕에서 호슬리를 만났다. 그는 헌트가 F3에 출전할 자리를 마련해 주기로 했다. 후원자로 헤스키스 경이 나섰다.


1973년 헤스키스는 서티스의 F2 경주차 한 대를 샀지만, 헌트가 테스트 중 경주차를 들이받았다. 마음씨 좋은 헤스키스는 내침김에 서티스의 F1 경주차 한 대를 빌렸다. 헌트는 영국 브랜즈 해치에서 벌어진 ‘레이스 오브 챔피언즈’에서 3위를 올랐다. 그러자 헤스키스는 F1 이하의 하위 레이스에는 출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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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이 마치 F1 경주차를 주문한 헤스키스는 마치의 젊은 기술자 하비 포스틀웨이트에게 새차 설계를 주문했다. 더불어 이스턴 네스턴에 자리한 자신의 대저택에 경주차 공정을 차렸다.


든든한 스폰서를 만난 헌트는 곧바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그랑프리에서는 데뷔 후 첫 득점을 따내는 등 가파를 성장세를 보여주었고, 영국 실버스톤에서 감동적인 레이스를 펼친 뒤 4위로 피니시라인을 갈랐다. 뒤이어 왓킨스 글렌의 미국 그랑프리에서는 로니 페테르손에 이어 환상적인 2위 표창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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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첫해 헤스키스 레이싱은 다른 팀들의 질시를 받았다. 가는 곳마다 롤즈로이스 대열을 몰고 다니며 파티를 열었기 때문이다. 파티를 주관하는 집사는 샴페인을 비롯한 재료를 챙기는 데 정상을 다했다. 그렇다고 호화판 파티에만 정신이 팔렸던 것은 아니었다. 레이스 결과를 보고 다른 팀들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키 스튜어트가 F1에서 물러나자 서킷에는 새로운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헌트는 새 질서의 선두그룹에 끼어 들었다. 포스틀웨이트가 설계한 헤스키스 308은 1974년 실버스톤에서 벌어진 인터내셔널 트로피에 출전했다. 이때 헌트는 표창대 정상에 올라 열광적인 인기를 모았다. 마스코트인 귀염둥이 곰과 함께 헤스키스 레이싱은 관중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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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시즌에도 헤스키스는 선두를 다투었지만 페라리가 타이틀을 향해 질주했다. 페라리도 에머슨 피티팔디의 맥라렌에 타이틀을 빼앗기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해 다시 헌트는 왓킨스 글렌에서 시즌 최종전을 멋지게 마무리했다.


헤스키스 레이싱의 스피드는 시들지 않았다. 1975년 잔드보르트에서 거둔 환상적인 첫 우승은 처음이자 마지막 그랑프리 승리였다. 비가 오다가 개인 레이스에서 헌트는 일찌감치 슬릭 타이어에 운명을 걸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페라리의 니키 라우다를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주먹으로 허공을 찌르며 승리를 자축했다.


헤스키스는 단 한 번도 스폰서의 신세를 지지 않고 팀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마저 무한정 쏟아 부을 돈이 있을 리 없었다. 1976년에 들어서자 재정형편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반면 헌트의 주가는 끝없이 뛰어올라 사방에서 그를 노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피티팔디가 브라질 설탕 재벌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독자적 팀을 만들기 위해 맥라렌을 떠났다. 헌트가 곧바로 그 자리에 들어갔다. 1976년 N. 라우다와 역사적인 결투를 벌인 뒤 마침내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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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키스는 팀 운영을 포기하고 경주차를 프랭크 윌리엄즈에게 팔아 넘겼다. 그때 마침 윌리엄즈는 캐나다 석유 부호 월터 울프와 손을 잡았다. 포스틀웨이트의 308C는 울프-윌리엄즈로 탈바꿈했다.


호슬리는 그 뒤 2년에 걸쳐 헤스키스 레이싱을 지켜나갔다. 낡은 경주차를 손질하고 월급쟁이 드라이버를 고용했다. 엔지니어 프랭크 더니가 308E 경주차를 설계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헌트와 맞먹을 드라이버가 없는 헤스키스 레이싱은 초기의 의욕을 잃고 점차 시들었다. 얼마 동안 주문형 코스워스 엔진의 서비스에 열중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고전적인 영국 모터스포츠의 낭만적인 한 시대는 이로써 막을 내렸다.


5년 동안 F1 그랑프리에서 뛴 헤스키스의 최고 성적은 컨스트럭터 4위(1975년). 드라이버 13명이 헤스키스를 거쳐 갔고, 이 가운데 제임스 헌터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다. 헤스키스 레이싱을 떠나 76년 맥라렌으로 이적한 헌트는 니키 라우다와 역사적인 결전을 벌인 뒤 마침내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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