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오토뉴스

상단배너

  • 검색
  • 시승기검색
ä ۷ιλƮ  ͼ  ī 󱳼 ڵδ ʱ ڵ 躴 ͽ ǽ ȣٱ Ÿ̾ Auto Journal  Productive Product
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섀시 명문 '롤라'의 F1 도전 알아보니…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5-09-30 23:57:14

본문

현재 F1에서는 10개 팀이 뛰고 있다. 1950년 현대적인 F1 그랑프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레이서와 팀이 명멸했다. 몇몇 F1 드라이버가 은퇴 후 팀을 만들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롤라 레이싱팀도 그 중 하나다. 사실 미국 모터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팬은 ‘롤라’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미국판 F1 그랑프리였던 챔피언십오토레이싱팀즈(CART)의 섀시공급업체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롤라는 F1에서도 오랫동안 활약을 해왔다.

 

9e20feddfe27ef1010d17b64c7ce777a_1443624

1997년 F1 무대에 나타났다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F1 머신 제작에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는 롤라가 F1을 제패하지 못한 것은 전후 모터스포츠 역사에서 미스터리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롤라의 역사는 1967년 영국의 에릭 브로들 리가 경주차를 만들면서 시작된다. 그 후 롤라는 누구보다도 많은 경주차를 제작했고, 우승을 위해 숱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끝내 상위팀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F1에는 1962년 보메이커팀을 위해 섀시를 제작함으로써 처음 이름을 알리게 된다. 보메이커팀은 롤라 경주차에 존 서티스를 태우고 62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 출전한다. 데뷔전은 소득 없이 끝났지만 이어서 열린 영국과 독일 그랑프리에서 좋은 경기를 펼쳐 포인트를 쌓았다. 하지만 팀동료인 로이 살바도리는 단 1점도 건지지 못한 채 F1 무대에서 퇴출당했다. 1963년 서티스가 페라리로 옮겨가 버리자 보메이커는 소득 없는 한 해를 보냈다.

 

9e20feddfe27ef1010d17b64c7ce777a_1443625

1967년 롤라는 혼다팀을 위해 T130 섀시를 제작했다. 두 번째로 롤라 섀시의 경주차에 앉은 서티스는 이태리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해 무명의 혼다를 널리 알렸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혼다의 독자적인 우승으로 기록되었다. 74년에는 영국의 명 드라이버 그레이엄 힐이 탈 경주차를 만들었다. 힐은 2년간 롤라제 경주차를 몰았다.


80년대에는 F1을 떠나 미국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1986년과 87년 베아트리스-롤라가 미국의 오벌트랙을 휘어잡았다. 이런 활약이 가능했던 것은 롤라의 미국 수입업자 칼 하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롤라는 미국에서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88년 후반 유럽의 F1 무대로 다시 돌아왔다. 첫 번째 야심작은 라루스팀을 위한 경주차였다. 이와 함께 5년에 걸친 ‘파트-롤라’라는 명칭의 F1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목표는 컨스트럭터즈 우승컵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93년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스쿠데리아 이태리팀을 위한 섀시 제작이었다. 이 차에는 막강한 페라리 엔진이 올라갔지만 잦은 예선탈락으로 체면을 구겼다. 드라이버는 미켈레 알베르토였다.


90년대 중반까지 그럭저럭 섀시 제작에 몰두하던 창업자 브로들리는 60대 중반이 되자 큰 결심을 한다. F1팀을 창단해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40년 가까이 경주차를 만들어 오면서 크고 작은 회한을 느꼈다. 그 중 하나가 아무리 훌륭한 레이스를 펼쳐도 섀시 제작자는 그늘에 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포디엄에 선 드라이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경주차의 프로필에는 팀과 엔진 메이커 이름이 크게 올려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9e20feddfe27ef1010d17b64c7ce777a_1443625

이런 배경을 안고 1997년 롤라팀이 출발했다. 경주차는 자체 제작한 섀시에 포드 엔진을 얹어서 완성했다. 드라이버는 이태리 출신 빈첸초 소스피리와 브라질의 리카르도 로세트를 영입했다. 소스피리는 F3000 챔피언을 거쳐 롤라를 통해 F1에 데뷔한 신인이고, 로세트는 애로우즈에서 데려왔다. 1년을 갓 넘긴 상태여서 그도 신인이나 다름없었다.

 

9e20feddfe27ef1010d17b64c7ce777a_1443625

롤라의 출현은 F1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으나 팀들을 긴장시키지는 못했다. 소스피리와 로세트는 약속이나 한 듯이 첫 경기인 호주 그랑프리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런 결과에 실망하거나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주차를 테스트할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주차는 느렸으며 예산도 빠듯했다.


폴포지션에서 무려 11초나 뒤진 기록을 세웠음에도 롤라팀은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3주 뒤에 열리는 브라질 그랑프리에서는 출발 그리드에 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적이 일어나야 했다.

 

9e20feddfe27ef1010d17b64c7ce777a_1443624

사실 롤라의 출발은 힘겨웠다. F1팀의 성적은 돈이 결정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상업성이 짙은 곳이다. 그런 만큼 팀을 창단하기 위해서는 든든한 스폰서나 재력가의 후원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롤라는 둘 다 갖추지 못했다. 롤라팀의 출범이 무산될 것처럼 보였으나 1996년 11월 파란불이 켜졌다. 마스터카드가 스폰서로 나선 것이다. 롤라는 3개월 만에 T97/30 경주차를 만들어냈다. 당연히 풍동실험 같은 것은 할 여유가 없었다. 엔진 성능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경주차만 갖고 있을 뿐 다른 보조수단이 없는 현실에서 스텝과 드라이버들은 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브라질의 레이스 트랙을 밟지도 못하고 돌아온 팀원에게 브로들리는 F1팀으로서 첫 출발이 실패했다고 자인하면서 “처음으로 돌아가 제로 상태에서 제4전 이몰라에 도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마음가짐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모터스포츠다. 이몰라의 도전도 실패로 돌아가고, 팀은 완전 해체되었다. 롤라팀은 600만 파운드의 빛을 안고 파산했다. 소스피리와 로세트는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고 F1 무대에서 이름을 지워야 했다. 게다가 로세트에게는 97년 최악의 드라이버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까지 붙었다. 그리고 섀시 메이커가 만든 F1팀 롤라의 운명은 1997년을 끝으로 그랑프리 무대의 뒤안길에 접어들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하단배너
우측배너(위)
우측배너(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