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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레이톤 블루’로 이름 높은 섀시 명가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6-03-31 09:32:30

본문

그랑프리 서킷을 포효하듯 질주하는 F1 머신의 컬러는 화려하다. 그 가운데 지금은 사라졌지만 ‘레이톤 블루’만을 고집했던 마치팀의 F1 머신은 데뷔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마치(March)팀이 F1에 데뷔한 해는 1970년. 열성 팬들이 모여 F1팀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신생 마치는 다른 팀에 경주차를 팔았다. 그랑프리에 첫발을 내딛은 마치는 69년 챔피언 재키 스튜어트를 드라이버로 맞아들여 데뷔전부터 폴포지션을 잡는 파란을 일으켰다. 

4명의 창단 멤버는 현재 국제자동차연맹(FIA) 회장 막스 모즐리를 비롯해 앨런 리즈, 그레이엄 코커와 로빈 허드였다. 허드는 업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디자이너였다. 그전까지 맥라렌 소속이던 그는 비록 완성차가 나오지 못했지만 코스워스의 네바퀴굴림(4WD) 차를 설계한 적이 있었다. 1969년 네 사람은 영국 비스터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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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스튜어트는 69년 포드 엔진을 얹은 마트라 경주차로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러나 문제의 프랑스 메이커 마트라는 70년에 자체 개발한 V12 엔진을 얹을 계획이었다. 드라이버인 스튜어트와 켄 티렐은 그 방안이 탐탁치 않았다. 그때 새로운 섀시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 섀시 명가 마치가 그랑프리 팀을 창단한 것이다. 

화제를 몰고 다닌 마치는 먼저 에이스 드라이버 영입을 서둘렀다. 로터스팀의 요헨 린트를 빼내려다 실패한 마치는 내분에 싸인 마트라의 스튜어트를 불러들였다. 뒤이어 워크스팀을 만들고, 다른 F1팀에 경주차를 팔았다. 이렇게 해서 1970년 F1 개막전 남아프리카 그랑프리에는 4대의 마치 701S 경주차가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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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마치는 F2, F3과 F5000용 경주차를 만들었다. 워크스 드라이버는 크리스 에이먼과 요 시페르트, 스폰서는 STP였다. 그리고 일부 경기에서는 마리오 안드레티가 예비차를 몰고 나갔다. 

마치 701은 서둘러 만들었기 때문에 성능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에이먼은 영국 실버스톤 인터내셔널 트로피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스튜어트가 브랜즈 해치에서 열린 챔피언 레이스에서 우승했고, 키알라미에서는 PP를 잡았다. 이때 에이먼이 예선 2위로 그리드에 나란히 섰다. 하지만 결승에서 잭 브라밤의 BT33이 압승을 거두었다. 에이먼은 중도탈락하고, 스튜어트는 3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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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는 스페인에서 다시 표창대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차체가 무거운 701이 허덕거렸고, 특히 신형 로터스 72를 따를 수 없었다. 시즌 종반에 스튜어트는 마치를 떠나 티렐 경주차 1호를 몰게 되었다.

마치는 스웨덴의 유망한 젊은 별 로니 페테르손을 맞아들였다. 그때 허드가 개성 있는 711을 만들어냈다. 유명한 ‘쟁반형’ 앞 윙을 단 경주차였다. 페테르손은 711을 몰고 타이틀을 노렸다. 티렐의 스튜어트가 서킷을 주름잡았지만, 페테르손은 자그마치 6회나 2회 표창대에 올랐고, 랭킹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 뒤 허드는 혁신적인 721X 제작에 착수했다. 핸들링을 개선하기 위해 기어박스는 엔진과 액슬 사이에 두었다. 경험이 없는 니키 라우다가 그런 방식으로는 가망이 없다고 말했지만 마치팀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야 페테르손도 그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치는 F2 경주차를 바탕으로 허둥지둥 721G를 만들었다. ‘G'는 사내에서 ’기네스북‘의 머릿글자로 통했다. 기네스북에 오른 만큼 경주차를 개발했다는 농담 섞인 호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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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시즌에 마치는 페테르손을 로터스에 빼앗겼다. 언제나 재정문제와 다른 팀의 경주차 제작에 시달리던 마치는 응급처방을 찾았다. 그랑프리에 F2 경주차를 개조해 내보냈고, 거의 단기 고용 드라이버가 마치 시트에 앉았다. 1970년 스튜어트가 스페인의 제2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1975년 오스트리아전에 가서야 마치 워크스 드라이버가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그때 ‘몬자의 고릴라’ 비토리오 브람빌라가 폭우로 단축된 레이스를 제압했다. 그러나 체커기를 받은 뒤 두 손을 번쩍 들고 달리다 충돌사고를 내고 말았다. 

1976년 페테르손이 돌아와 761을 몰고 이태리 그랑프리 정상에 오른 뒤 티렐 팀으로 떠났다. 그 다음 시즌이 끝나면서 마치는 F1에서 사라졌다. 다시 10년이 지난 뒤 일본 업체 라이튼 하우스의 후원을 받으며 F1에 복귀했다. 라이튼의 사장 아카키 아키라는 뒷날 일본에서 사기죄로 기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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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카펠리가 애드리언 뉴이의 881과 CG901로 한때 좋은 성적을 올렸다. 88년에는 포르투갈에서 2위에 올랐고, 90년 프랑스에서는 종반까지 선두를 달리다 2위로 밀렸다. 그러다 심각한 재정난에 빠진 마치는 92 시즌이 끝난 뒤 그랑프리 무대에서 철수했다. 17년 동안 230전에 출전한 마치는 3승, 5PP, 컨스트럭터즈 포인트 180점을 거둔 채 레이톤 블루와 함께 F1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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