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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미국 출신의 마지막 F1 챔피언은?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7-10-31 12:36:43

본문

마리오 안드레티가 F1을 시작한 지 40년이 흘렀다. 그의 인생에 불을 지핀 것은 1954년 몬자의 F1 이태리 그랑프리다. 14세 때 그의 영웅인 알베르토 아스카리를 그랜드스탠드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스카리는 모든 코너에서 먼지를 일으키면서 팀동료 메르세데스 드라이버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달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후 안드레티는 레이스 드라이버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글 / 김병헌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하지만 그 다음해 안드레티 가족은 고향인 이태리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 가는 바람에 모든 것이 꼬였다. 안드레티는 두 번 다시 F1 머신을 못 볼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해 했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이 보였다. 펜실베니아주 나사렛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몇 km 떨어진 곳에서 레이스를 위해 줄 서서 대기하고 있는 경주차를 목격했다. 몬자에서 본 드라이버들과 천지차이였지만 요란한 소리와 흥분은 그대로였다. 그것은 스톡카 레이스였고 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첫 경주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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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중반에 미국 자동차경주를 주도하던 드라이버 중 한 명의 젊은 스타로서 안드레티는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예리한 테스트 드라이버로서 그는 열정을 다해 임했고 타원형의 진흙탕을 나와 레이스 트랙으로 옮겼다. 그리고 매서운 눈으로 F1을 맛보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1965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짐 클라크와 콜린 채프먼을 만났다. 곧바로 안드레티와 클라크는 친구가 됐다. 그때 안드레티는 F1에 도전해보는 것이 소망이라고 클라크에게 말했다.

 

클라크는 안드레티에게 “언제든지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나를 불러”라고 말했다. 몇 년 후인 1968년 모든 USAC 로드 레이스에서 우승한 후 안드레티는 F1에 뛰어들었다. 시작해야 할 시기라는 것을 알았다. 안드레티는 시즌 마지막 레이스인 몬자와 왓킨즈 글렌의 레이스를 원했다. 그래서 채프먼을 불렀고 채프먼은 즉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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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드레티에게는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다. 이태리 그랑프리가 열리는 주말인 토요일에 미국의 호저 100에서 레이스하기로 선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개의 레이스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 이태리 당국은 안드레티에게 특별한 허가를 해줬기에 2개의 이벤트를 치를 수 있었다. 금요일에 있었던 연습에서 안드레티는 그리드 7위를 획득했다. 그리고 오후 2시에 헬리콥터를 타고 밀라노의 말펜사 공항으로 갔다. 그곳에서 비행기로 갈아타서 뉴욕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뉴욕에서 개인 전용기 리어로 인디애나폴리스까지 갔다. 후저 레이스에서 2위로 끝냈고 다시 보스턴으로 날아갔다. 보스턴에서 유럽으로 간 뒤 그랑프리의 관계자가 헬리콥터를 준비해줘 안드레티는 그곳에서 트랙으로 갔다. 하지만 안드레티가 도착했을 때 오직 한 명의 미캐닉만 그를 반겨줬고 석연찮은 이유로 레이스에 불참하게 되었다.

 

그랬기에 그의 F1 데뷔는 그 다음 레이스였던 왓킨즈 글렌에서 이뤄졌고 쉽게 적응했다. 미국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G. 힐, B. 맥라렌 그리고 J. 스튜어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반의 F1에서는 기반을 다지지 못했다. 그는 미국 파이어스톤의 테스트 드라이버로도 활동하며 유럽과 미국에서 동시에 경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안드레티는 D. 거니가 벨즈 파넬리 존스 팀과 같이했던 올 아메리칸 레이서 프로젝트를 모방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채프먼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안드레티의 경력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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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시즌의 결실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안드레티와 채프먼은 경주차를 우승마로 만들 것이라고 맹세했고 결국 일본 그랑프리에서 실현했다. 하지만 1977년 시즌은 최악이었다. 그해 많은 레이스에서 안드레티는 떨어졌다. 1978년에 페라리는 안드레티에게 드라이버 자리를 제시했다. 본격 상담을 위해 이태리 마라넬로로 갔다. 안드레티는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금액의 2배를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것은 위험요소에 따른 당연한 대가였고 안드레티는 설명했다.

 

안드레티는 채프먼에게도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채프먼은 페라리가 안드레티에게 제시한 금액에 맞춰졌다. 그래서 안드레티는 로터스에 남았다. 채프먼은 안드레티의 파트너로 로니 피터슨을 영입했다. 하지만 안드레티는 채프먼에 불만을 가졌다. 피터슨이 매우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기술 면에서는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피터슨과 안드레티 사이에는 엄청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긍지도 있었다. 안드레티는 여태껏 같이 지내본 팀동료 중 피터슨이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그리고 경주차를 다루는데 있어 안드레티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기술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몬자에서의 피터슨의 죽음은 안드레티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레이스에 전력을 다해 그를 애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월드 타이틀 방어는 형편없던 경주차 때문에 무산됐다. 안드레티는 또다시 F1이란 광야에서 표류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82년 그는 마라넬로에 있는 엔초 페라리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질 빌르너브의 죽음과 디디오 피오니의 커리어 엔딩 사고로 엔초 페라리는 이태리 그랑프리에서 드라이브할 드라이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감동적인 귀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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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티는 페라리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 F1은 거의 끝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그런 부름은 기쁨 그 자체였다. 하지만 한 번도 터보 경주차를 드라이브해 본 적이 없어 피오라노에서 이틀간 테스트하기로 했다. 87번의 랩을 돌았고 새로운 코스 기록을 세웠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몬자에서 레이스할 준비가 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N. 피켓과 함께 멋진 레이스를 펼쳤지만 머신의 왼쪽 터보 트러블로 3위를 했다. 예선에서는 형편없었기에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500명 이상의 인파가 커브레스모가 있는 트랙으로 쏟아져 나왔다. 모두 환호했다. 그 소식은 트랙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로 퍼져나갔다. 안드레티는 엔초 페라리와 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모든 것에 있어 엔초 페라리의 대리인을 통하지 않고 항상 그와 직접 해결했기 때문이다.


다만 페라리를 위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드라이브를 못한 것은 아쉬워하고 있다. 그는 페라리 경주차에 잘 맞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했다. 페라리가 드라이버를 찾고 있을 때 안드레티는 이미 다른 팀에 있었고 반대로 그가 시간이 있을 때는 페라리는 이미 다른 드라이버와 계약한 상태였다. 만약 타이밍이 잘 맞았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그 누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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