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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영국 팬들이 기억하기 싫은 F1 암흑기는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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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9-01-28 17:04:30

본문

영국 출신 루이스 해밀턴이 지난해에 2년 연속 F1 그랑프리 종합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2014∼2015년에 이어 두 번째이다. 2008년과 2009년에는 루이스 해밀턴과 젠슨 버튼이 연달아 종합우승컵을 차지해 2000년대 들어 6차례나 영국인 출신이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 이전에는 연이은 영국인 월드 챔피언의 탄생이 흔치 않은 일이지만, 전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해밀턴과 젠슨 버튼 이전에도 1962년부터 1964년까지 그레이엄 힐, 짐 클라크, 존 서티즈가 연달아 챔피언이 된 기록이 있고 1968년, 1969년의 그레이엄 힐과 재키 스튜어트가 있었다.

 

영국 팬들은 그 순간을 마음껏 즐겼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존 왓슨이 152회의 그랑프리에서 5번의 우승을 거둔 것 외에는 영국 팬들이 열광할만한 소식이 너무나도 적었기 때문이다.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존 왓슨은 간발의 차이로 당시 윌리엄즈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케케 로즈베르크에게 1982년 드라이버즈 월드 챔피언십을 빼앗겼다. 경주차 밖에서는 마음이 무척 여린 편인 왓슨의 성격은 브라밤과 맥라렌에서 니키 라우다와 팀동료가 되면서 심리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레이스의 난투 속에서 발휘되는 왓슨의 기술과 천부적인 실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트랙 밖에서는 라우다의 날카로움이 그를 더 우위에 서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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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이젤 만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수로 평가받은 데릭 워윅도 영국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81년에 툴레만-하트 터보로 F1 데뷔전을 치렀고, 1984년에 르노로 이적하기 전까지 위트니 기반의 이 팀에서 3년간 활동했다. 워윅은 1984년 시즌 리오 경기에서 선두로 달리던 중 프론트 서스펜션에 이상이 생겨 아깝게 우승을 놓쳤다. 이후에 졸더와 브랜즈 해치에서 2위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상황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다.

 

1986년에는 아일톤 세나의 팀동료로 로터스에 영입될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세나는 로터스가 경주차 2대 모두를 경쟁력 있게 준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워윅이 자신에게 집중된 관심을 가로채길 것을 염려한 세나는 그의 영입을 반대했고, 팀동료 자리는 워윅 대신 경험이 부족한 조니 덤프리즈에게 돌아갔다. 로터스는 1986년에 세나의 팀동료가 될 선수로 워윅 대신 덤프리즈를 영입했다. 이후 순수 혈통의 덤프리즈는 자동차경주를 향한 열정을 묻어두고, 1993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뷰트 지역의 후작이 되었다.

 

물론 당시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영원히 지원 역할만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영국 드라이버가 몇 명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재능이 부족하거나 경주차가 열악하거나 혹은 레이싱에 전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세 가지 이유를 모두 안고 있는 드라이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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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 냉장고 회사의 창립자인 찰리 펄리의 아들, 데이빗 펄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낙하산부대 장교 출신으로, 1960년대에 중동의 분쟁지역인 아덴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고,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데이빗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인생설계에 대한 측면에서는 다소 무계획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모든 스포츠에 능했던 데이빗은 잔부트에서 열린 1973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모습으로 인해 조지 메달을 수상했다. 당시 그는 전복되어 불타오르던 마치 경주차에서 로저 윌리엄슨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비극적이게도 구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펄리는 아버지의 이니셜을 섀시 번호로 사용해, Lec CRP1이라는 자신만의 경주차를 직접 개발했다. 그러나 그 경주차로 출전한 1977년 영국 그랑프리 연습주행에서 심각한 다리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에 앞서 졸더의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경기 중 내린 비로 팀들이 앞다퉈 이른 타이어 교체 피트스톱을 감행하며 혼란이 벌어지는 동안 펄리의 머신이 1위로 올라갔다. 그는 이후 불행이도 자신이 조종하던 비행기가 서섹스 해안의 바다로 추락하면서 1985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플레이보이로서 명성을 쌓으며, F1에서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루퍼트 키건이 있었다. 에섹스 출신의 루퍼트는 항공사 사장이자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마이크 키건의 아들인 루퍼트는 1976년에 쉐브론 소속으로 영국 F3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두었고, 이듬해에 헤스키스 308E를 타고 F1에 입성했다. 아버지의 회사인 ‘브리티시 유나이티드 에어 페리’가 후원하는 로터스와의 협상이 진행된 적도 있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만약 그 협상이 이뤄졌다면 루퍼트는 경쟁력을 갖춘 경주차로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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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 성능 좋은 포뮬러 포드 로터스 69F를 타고 데뷔한 티프 니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F3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으면서도 1979년에 엔사인 F1팀 소속으로 출전하는 데 필요한 국제자동차연맹(FIA) 슈퍼 라이선스를 얻지 못했다. 1980년에는 마침내 그랑프리에 출전해 완주하지 못했지만 그로 인해 대담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F1 스타로서 잠재력을 지녔던 영국 드라이버들 중 가장 불운했던 인물은 단연 스테픈 사우스. 런던 북부 출신인 그는 1977년 마치 소속으로 영국 F3 우승을 차지했다. 1980년에는 톨레만 F2 팀에서 활동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그 기회를 포기하고 대신 롱비치에서 열린 미국 그랑프리 웨스트 레이스에 부상당한 알랭 프로스트의 대체 선수로 참가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사우스는 예선 통과에 살패했고, 같은 해 캔암 스포츠카 경주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고의 여파로 다리를 절단해 그의 선수 생활은 갑자기 끝나버렸다. 한편 브라이언 헨튼과 데릭 워윅을 영입한 톨레만 팀은 그 해의 F2 시즌에서 지배적인 활약상을 보여줬다. 헨튼은 개인 참가자 자격으로 1977년에 F1 마치 머신을 타고 출전했고 이후 티렐 소속으로 출전한 1982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패스티스트랩을 기록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이 같은 성적을 이뤄낼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1981년에 워윅과 함께 톨레만-하츠 팀 소속으로 F1에 복귀했지만 1982년에 스폰서십을 의식한 팀이 테오 파비의 기용을 고려함에 따라, 데릭보다는 8살 많은 헨튼이 방출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사교적이고 인기도 많았던 헨튼이었지만,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은 F1 기준에서는 스피드가 떨어지는 드라이버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펄리와 워윅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영국 드라이버들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준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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