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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동료들이 인정한 드라이버 ‘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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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2-08-20 11:3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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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이 인정한 드라이버 ‘모스’

F1 그랑프리가 올해로 62째를 맞이한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드라이버들이 울고 웃었다.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는 F1의 전설적 영국 출신 드라이버 스털링 모스도 빼놓을 수 없는 선수 중 하나다. 어려서부터 자동차경주를 보고 자라 자연스럽게 흥미를 가졌던 그는 18세인 1948년에 쿠퍼 경주차를 마련해서 작은 규모의 힐클라임 레이스에 출전했다. 처음 경험한 로드 레이스는 그에게 많은 즐거움과 성공을 가져다주었고 모스는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

이듬해 그는 서킷 레이스에 진출했다. 짧은 경력을 가졌지만 모스는 F3에서 승승장구했다. 얼마 후 그의 재능을 높게 평가한 HWM팀에 스카우트되어 F2 머신을 타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여러 팀에서 제의를 받고 출전한 스포츠카 레이스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 가운데 투어리스트트로피에서 우승컵을 차지했고, 랠리에도 참가해 그의 드라이버 경력을 화려하게 치장했다. 첫 출전한 1952년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2위를 해 관계자들과 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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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드라이빙 테크닉 덕분에 후앙 마누엘 판지오와 함께 당시 모스는 F1의 뛰어난 드라이버였다. 하지만 1951년 스위스 그랑프리에서 데뷔한 이후 53년까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의 영국제 머신은 알파로메오와 마세라티에 비해 성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스는 조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다른 팀이나 머신을 선택하지 않았다. 페라리가 그의 실력을 높이 사 영입하고자 했으나 거절했다. 자존심을 선택한 결과는 보잘것없는 성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눈에 띄는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머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그는 1954년 강한 팀에 들어가기로 했다. 여러 곳을 접촉한 결과 메르세데스 팀장 뉴바우어가 가장 호감을 보였다. 하지만 팀에 들어오기 전에 빠른 머신을 타고 우승권에 근접한 성적을 보여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모스는 당시 가장 빨랐던 마세라티 250F를 사들였고, 벨기에에서 3위에 올랐다.

뉴바우어가 제시한 조건을 만족시키고, 다음 시즌 메르세데스 소속이 되었다. 모스와 판지오가 파트너를 이룬 메르세데스는 전례 없는 강력한 드라이버 라인업을 구성하게 되었다. 드라이빙의 달인 판지오에게서 모스는 많은 것을 배웠고 둘은 호흡이 잘 맞았다. 55년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판지오가 피니시 라인을 앞두고 속도를 늦춤으로써 모스가 F1 첫 우승을 올리기도 했다. 그 해는 메르세데스의 독무대였다. 판지오는 생애 3번째 월드 타이틀을 따냈고 모스는 그를 뒷받침하며 종합 2위에 만족해야 했다. 55년 다른 드라이버들은 전혀 두 사람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다. 팬들은 56년에도 메르세데스 드림팀의 멋진 드라이빙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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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서 메르세데스 머신이 관중석으로 날아가 80여 명이 사망하는 대사고가 났다. 도의적 책임을 느낀 메르세데스는 모터스포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고 F1팀 역시 해체되었다. 모스는 마세라티로 옮겼고, 판지오는 페라리 드라이버가 되었다. 비록 팀은 바뀌었지만 두 드라이버의 화려한 전적은 계속 이어졌다. 아르헨티나 출신 드라이버 판지오는 3승을 올리고 56년 시즌 챔피언이 되었고, 모스는 2승을 거두어 또 다시 종합 2위가 되었다.

다음해인 57년 모스는 영국의 반월팀으로 이적했다. 그해 3승을 올린 그의 성적은 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표창대에서 판지오보다 낮은 곳에 서야 했다. 하지만 이듬해 판지오가 그랑프리에서 은퇴한 뒤 월드 챔피언십은 모스의 독무대. 모스가 필요했던 것보다 챔피언십이 그를 필요로 했다.

언젠가 판지오는 “나의 현역 시절, 모스가 최고였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당대 최고 드라이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으므로… 엔초 페라리도 모스의 위대함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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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에 엔초는 모스를 바리로 불러 경주차를 테스트해 보게 했다. 하지만 모스가 나타나자 노장은 모스가 안중에도 없는 듯이 홀로 테스트하게 했다. 그러나 1961년에 엔초는 모스와 대화를 나누며 로마교황을 대하는 것처럼 경건한 자세를 취했다. 페라리는 모스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실로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모스의 탁월한 실력 덕이다.

모스는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판지오에게 물었다”고 설명했다. 판지오는 “엔초를 위해 뛰지만 계약은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 뒤 나는 엔초에게 말했다. “페라리 156으로 참가하고 싶다.” 페라리가 브리티시 레이싱 파트너십(모스의 아버지 알프레드와 그의 매니저 켄 그레고리가 1958년에 설립한)에게 제공한 머신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식으로 하겠다. 나는 페라리 156을 롭 워커의 파란색(당시 모스는 워커로 레이싱 했다)으로 칠하고 싶다. 마침내 페라리는 경주차를 만들었다.”
그 뒤 모스는 1962년 챔피언십 타이틀과 상관없이 굿우드에서 열린 이스터 그랑프리에 나섰다가 큰 화를 입었다. 그의 머신이 코너에서 중심을 잃고 흙 제방으로 돌진했다. 모스는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고, 구겨진 머신에서 끌려나온, 피 흘리는 모습이 신문에 실려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모스는 사고 직후 “언젠가 일어날 일이 생겼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면서 드라이버 경력에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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