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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오토뉴스 채영석 국장은 30년 동안 자동차 전문기자로 활동해 왔으며 인터내셔널 엔진 오브 더 이어, 월드 카 오브 더 이어의 심사위원이다. 골드만 삭스 등 투자은행들과 다른 시각으로 산업 분석을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3,000종 이상의 차를 타고 시승기를 쓰고 있으며 세계적인 모터쇼와 기술세미나 등에 참석해 글로벌 차원의 트렌드 분석에 힘을 쏟고 있다. 2013년 골드만 삭스가 유가 200달러 시대를 이야기했을 때 역으로 유가 폭락 가능성이 있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11. 미국차 황금 시대, 소비자 운동으로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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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charleychae@global-autonews.com)
승인 2016-12-16 17:52:38

본문

2차 세계 대전의 전흔이 없이 시작된 미국의 20세기 후반은 그야말로 ‘영광과 번영의 시대’였다. 생산시설의 대부분을 잃은 유럽 메이커들과 전혀 다른 출발선에 서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번영의 시대를 만끽할 수 있었다. 1949년 4,500만대였던 자동차 보유대수가 1972년에는 1억 1,900만대로 급증한 수치가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 시대를 ‘미국 자동차의 황금시대’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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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을 끝낸 것은 미국이다.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할 때 성경책에 손을 얹는 기독교의 나라 미국은 과학자 4,400명을 모아 일거에 더 많은 살상을 할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라는 미션을 준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원자폭탄이다. 1945년, 원자폭탄의 투하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어느 쪽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것은 엄청난 시각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피해자가 있고 수혜자가 있는 것이 전쟁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되어 20만명의 사상, 가구 6만호 파괴, 12㎢가 폭풍과 화제에 의해 괴멸됐다. 나가사키에 투하도 14만명을 죽였다. 당대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핵 폭탄에 의해 시작된 인류의 재앙이다. 그 핵 폭탄을 상업화한 것이 핵발전소다. 에너지 부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전히 많은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이 참전한 1941년 이후 종전까지 미국시장에는 신차가 출시된 적이 없었다. 때문에 민간차량 제조회사로 돌아온 자동차회사들은 신차 출시에 힘을 쏟았다. 당장에는 1942년에 출시하려던 차 모델을 약간 바꾼 ‘신차’들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미국 자동차 시장이 다시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바뀌었다. 자동차 생산은 급증했고 디자인과 혁신적인 기능, 승차감, 그리고 연비성능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미국차가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 이 시대를 주도한 것은 GM 이었다. GM의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은 다른 경쟁사들을 압도했다. 포드와 크라이슬러도 상승세를 탔지만 GM과 경쟁이 되지 못했다. GM그룹이 내놓은 모델들은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었고 과감한 스타일링과 크롬도금 등으로 화려함의 극에 달했다.

 

새로운 세그먼트와 새로운 장르의 모델들이 등장했다. 제 2의 모터리제이션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처럼 배기가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고 고유가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나 할부금융을 통해 손 쉽게 자동차를 소요할 수 있었다. 자동차는 프랑스 철학자는 ‘거대한 고딕 성당에 해당한다.’고 찬양할 정도였고 더 이상 돈 많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자동차의 증가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이루어졌고 이는 결국 이 시대가 미국이 인류 최대의 풍요를 만끽한 시대라는 평가를 받는 배경이 된다. 우리가 말하는 미국의 세기는 이 30년간을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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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등장한 상징성이 강한 모델이 1953년 등장한 캐딜락 엘도라도다. 록히드 P-38전투기를 모티브로 한 꼬리 지느러미(태일 핀)를 채용한 거대한 차다. 이 차를 비롯한 당대의 차에 대해 진정한 디트로이트 맨 밥 러츠는 ‘환상 그 자체’라고 후에 평가했다. 그 전에 미국차로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터커라는 차가 있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터커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그것을 파는 것이 무엇보다도 어렵다.’는 진리를 보여 주었다. 유럽 자동차회사들은 전쟁으로 초토화된 자동차 생산 시설을 재건하는데 힘을 쏟을 때 미국차는 날개를 달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자동차 캐딜락은 미국의 부의 상징의 대명사였고 다른 메이커들도 캐딜락 따라 하기에 나섰다. 골프장과 호텔에 캐딜락이 얼마나 드나드는지가 등급의 조건이 됐다. 당시의 차들은 번쩍이는 크롬 도금으로 치장되어 부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GM의 디자이너 헤리 얼은 자동차를 사는 사람의 심리학적인 동기를 이렇게 분석했다. ‘자동차에 크롬 합금의 장식을 넣고 중압감을 넣어 주면 고객은 지불하는 금액 이상의 것을 산 기분이 되는 것이다.’

 

이 때부터 미국의 자동차는 크롬 합금이나 스테인레스 스틸 등의 액센트를 이용하게 되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GM이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책 때문에 GM은 부동의 미국 제1의, 더 나아가 세계 제1위 자동차 메이커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크롬 장식은 차종 구별이 쉽고 원가가 적게 먹힌다. 차종 다양화에도 효과가 있다. 중고차가 되어도 보디 도장부문의 파손을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게 하는 역할도 있다. 즉, 중고차로서의 가격도 높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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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GM이 크롬 합금 사용에만 열중하지는 않았다. .1942년형의 뷰익(Buick)에서는 앞뒤 팬더를 차체와 일체화시키는 등 이미 플래쉬 사이드 보디의 전조라고 할 수 있는 스타일링을 채용하기도 했다.

 

유럽차와 미국차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것이 영국 BMC의 미니(Mini)다. 1959년 출시된 미니는 1960년대 영국을 상징하는 차였다. 자동차 역사상 T형 포드에 이어 영향력이 있는 모델로 선정되기도 한 모델이었다. 미니가 인기를 구가한 그 시대 미국에서는 끝을 모르는 맥시(Maxi)의 시대가 열렸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물론 시장이다. 자동차산업이 규모의 경제를 배경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도 이 때 알게 됐다. 1950년 미국은 전 세계 자동차 생산의 81.5%를 점한 적이 있다. 평균 70% 수준이었다. 연간 600~700만대 규모의 시장이었다. 그 중 대부분은 미국 내에서 판매되고 소화되었다는 것이 시장의 위력을 말해 준다. 지금 우리는 중국시장의 위력에 놀라고 있는데 그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15억이라는 미지의 세계다.
 
미국시장에서 차를 판매하는 딜러들은 판매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지금처럼 인센티브에 의존해 판매 목표를 달성할 필요도 없었다. 더 비싸게 받을 수도 있었는데 1958년에 정가제를 의무화하는 자동차 정보 공개법이 시행되면서 사라졌다. 판매를 끌어 올린 기술적인 요소 중 하나는 1940년대 초반 GM이 처음 도입한 완전 자동변속기다. 그 외에도 파워 스티어링이 채용되어 여성들에게 어필했다. 배기량은 5리터가 보통이었다. 1948년 미쉐린이 개발한 레디얼 타이어가 1956년부터는 일반 차에도 대부분 장착됐다. 이 시대 부품은 포드와 크라이슬러가 GM으로부터 구입해 사용하는 구조였다. 크라이슬러의 기술력은 크게 차이가 나 존재감이 약했다.

 

부자들의 요구와 엔지니어들의 열정에 의해 다양한 편의 장비가 쏟아져 나왔다. 전기를 사용하는 시동키는 1949년 크라이슬러가, 발로 밟는 주차 브레이크는 1953년 뷰익과 올즈모빌에, 컨버터블의 자동 개폐 루프는 1942년에 도입됐다. 캐딜락은 1946년에는 파워 윈도우를, 1950년에는 파워 시트를 장착했다. 자동차에 라디오를 탑재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고 운행 중에는 작동할 수 없었지만 레코드 플레이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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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라는 명언(?)이 등장한다. 전쟁을 전후 해 13년동안 GM의 CEO를 지낸 찰스 어윈 윌슨이 국방장관 임명을 위한 청문회에서 한 발언이다. 그는 고속도로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아이젠하워 정부는 1956년부터 4만 1,000마일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320억 달러를 투자했다. 소위 ‘국가방위 고속도로 시스템(National Defense Highway System)’이라는 사업이었다. 당시 미국 교통 예산의 75%를 고속도로에 썼다. 대도시를 위한 투자는 수치를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추진된 이 고속도로 확대 정책은 후에 비판을 받는다. 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교외화가 촉진됐고 결과적으로 도시의 쇠락을 초래했다는 것 때문이다. 자가용 문화 일색의 사회에서 대중교통은 점차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치가 산업과 만나서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포퓰리즘에 의해 역효과를 낸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서 깨닫게 된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디트로이트 등 대부분의 미국의 대도시 공항에 도착하면 다운타운으로 가기 위한 교통 수단이 택시나 렌터카 외에는 없다. 요즘은 우버가 각광을 받으며 또 다른 형태의 사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도 각종 도로 건설을 하고 철도를 확대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무너진 상권이 많다. 뿐만 아니라 1인용 자동차의 증가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계산조차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1945년에서 1954년 사이 900만명의 미국인이 교외로 이사했고 1976년경에는 도심보다 외곽 지역 거주자의 수가 더 많아졌다.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는 1955년과 1960년 사이 인구의 25%가 교외로 나갔다. 도심, 즉 다운타운은 점차 비워졌고 2010년 기준 디트로이트 인구의 81.6%가 흑인이었다. 이런 교외 이주로 생겨난 문화가 드라이브 인이고 자동차 극장이다. 차를 탄 채로 예배를 볼 수도 있었다. 그로 인해 교회 출석률이 더 증가했다. 교외에 거대한 쇼핑몰이 생긴 것도 자동차 시대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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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캐딜락과 함께 미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자동차가 쉐보레 콜벳이다. 콜벳은 일대를 풍미했던 저 유명한 고급차의 대명사 캐딜락의 엘도라도와 같은 해인 1953년에 데뷔했다. GM의 최전성기에 등장한 모델이라는 얘기이다. 세계 자동차업계를 호령하던 미국 메이커들은 스포츠카라는 장르의 모델이 없었다. 당시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던 스포츠카들은 재규어를 비롯해 알파로메오, MG등의 유럽 브랜드의 로드스터가 주를 이루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덕에 번영을 누리고 있었고 항공분야에서도 선두주자로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었다. 당연히 자동차를 비롯한 생활용품도 감각적이고 화려한 스타일을 갖추게 되었다. GM은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자체적인 모터쇼인 모터라마(Motorama)를 1949년부터 1961년까지 개최했다. 음악과 조명, 배우들을 동원해서 어떤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은 쇼를 보여주었다.  콜벳은 그 모터라마의 전시용 컨셉트카로 처음 등장했다. 콜벳은 모터라마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53년 말부터 양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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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초기 콜벳은 성능면에서 그다지 평가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미국적인 체구와 스타일링을 갖추었지만 로드스터라는 차체에 직렬6기통 엔진이라는 구성에서는 유럽산 스포츠카를 상당히 의식한 모델이었다. 직렬 6기통 엔진은 스포츠카다운 출력을 제공하지 못했던 데다 3단 수동이나 2단 자동변속기와 짝을 이루어 동력성능은 당시 기준으로도 그리 대단하지 못했다. 1963년 등장한 가오리처럼 생긴 디자인으로 2세대 콜벳 스팅레이부터 미국 스포츠카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5세대에 걸쳐 생산돼 2004년까지 전 세계에 140만대가 판매되었으며 지금 그들은 캐딜락 르네상스와 함께 영광의 시대로의 회귀를 노리는 모델로 시장에 어필하고 있다.

 

GM은 콜벳이 전 세계에서 가장 열광적인 팬 층을 보유하고 있는 스포츠카라고 주장한다. 그 배경으로 브랜드 충성도 77%, 브랜드 인지도 94%를 들고 있다. 그런 충성도의 확보를 위해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내구 레이스 르망24시에 매년 출전하고 있다. 유럽 메이커들처럼 레이싱 대회를 통해 획득한 기술을 양산차에 피드백 해 오고 있다. 켄터키주 공장 근처에 콜벳 박물관을 갖추고 있을 정도로 역사와 관심이 대단한 모델이다. 유럽이나 미국은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한 차에 열광한다.

 

당시 GM의 디자인을 이끌었던 빌 미첼(Bill Mitchell)은 디자이너 출신으로 첫 GM의 부회장 자리에 오른 할리 얼보다도 재능이 더 많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재규어의 디자인 수장 이안 칼럼은 빌 미첼의 디자인에 대해 이 시대에도 많은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빌 미첼은 미국차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1938년에 출시된 캐딜락 60 스페셜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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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첼은 자신의 재능과 개성, 값비싼 치장을 통해 자동차 디자인의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는 건방질 정도로 자신만만했고 ‘마케팅’이나 엔지니어들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재무부서의 간섭도 무시하는 처사를 보이기 일수였다. 미첼이 이끄는 디자인 팀은 GM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잘 나갈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GM은 재능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일하고 싶어하는 제1순위 직장이었다.

 

미첼의 리더십 덕분에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꿈이 현실화되었다. 1959년형 쉐보레의 거대한 측면 지느러미부터 1961년형 캐딜락의 공기역학적으로는 불필요한 수직 지느러미까지, 하나같이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를 위한 디자인이 진행되었다. 미첼 그 자신도 오만하고 무례하여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듯이 미첼이 지휘한 디자인들도 몇몇 엘리트들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비쳤다.

 

그래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일반 대중은 GM의 차를 원했고, 그런 디자인이 더 나오기를 바랐다. 이 때부터 자동차의 기술과 성능이 스타일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예술작품이 된 것이다. 연비성능 등 기능성보다는 예술성을 중시하는 차만들기가 주도했다. 그 시절 등장한 폰티악 GTO, 올즈모빌442, 뷰익 리비에라 등 8기통 전성시대가 시작됐고 이 차들은 지금도 자동차 수집가들 사이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 차 엔진은 점점 더 커지고 더 강력해졌다. GM은 마력 경쟁에서 거의 대부분 승리했고, 리터당 75원 정도밖에 안 되는 저렴한 기름값 덕분에 리터당 4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연비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 당시 미국의 기름값은 다른 나라들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높은 기름값 때문에 유럽과 일본 자동차회사들이 작고 연비는 높은 차를 만들려고 노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럽의 오펠과 복스홀, 호주의 홀덴에 많은 자원을 투입하다 보니 GM의 해외 사업도 잘나갔다.

 

차 두 대가 팔리면 그 중 한 대는 GM 차였다. 트렌드를 앞서 가는 GM의 디자이너들과 GM차의 눈부신 디자인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이웃에게 뒤지기 싫어하는 미국 소비문화의 주축이었다. 고객, 자동차판매상, 부품공급회사 그리고 미국의 경제까지 모두 GM이 성공할수록 이익을 얻었다. 물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주목을 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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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면은 항상 있다. GM은 랠프 네이더(Ralph Nader)가 소비자운동을 표방하고 쓴 책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 Unsafe at Any Speed에 의해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네이더는 쉐보레 코베어(Corvair)의 엔진이 차 뒤쪽에 있어서 안정적이지 못하고 정면 충돌하면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네이더의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1960년대 중반에 코베어의 판매는 중단됐다. 당시 미국의 자동차 잡지 모터트렌드는 코베어를 ‘올해의 차’로 선정해 자동차회사들과 한 통속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소비자운동가 한 명에게 큰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GM은 사설 탐정을 고용해 네이더의 개인사를 캐고 추잡한 면을 찾아내 비판을 잠재우려 했다. 심지어 미인계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이렇게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당시 GM의 CEO 제임스 로쉬(James Roche)는 이 일로 공식 사과까지 하게 되었다. GM 역사상 최악의 순간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세상이 비밀은 없다.

 

이 사건으로 ‘자동차 안전’을 요구하는 운동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GM은 소비자들의 신뢰를 적잖이 상실했다. 네이더는 GM을 상대로 2,700만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재기했지만 타협으로 42만 5,000달러를 받았고 그 돈으로 GM의 안전을 감시하는 일을 했다. 그로 인해 생긴 법이 1966년 9월 9일 존슨 대통령 때 ‘고속도로 안전법과 교통안전’'이다. 이때부터 모든 자동차에 안전벨트 장착이 의무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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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GM은 흔들리지 않았다. 미국 내 시장점유율은 50%에 달했고, 1965년에는 프랑스 국영방송에서 한 시간짜리 특집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GM의 영향력을 다루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GM: 프랑스 1년 치 예산>이었다. 당시 GM의 매출액은 프랑스의 1년 예산을 넘었다. GM의 힘은 영원할 것이라는 인식이 깔린 내용이었다. 1995년 일본의 저널리스트 후니타니 후미오가 ‘토요타 이외에는 모두 사라진다.’라는 책을 냈었는데 그 30년 전 GM이 그런 말을 들었었다.

 

비판적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으나 GM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다. 1960년대 말, GM의 최고 경영진은 ’60-60-60’ 계획을 언급했다. ‘최고경영진이 60세가 될 때까지 시장점유율 60%, 주가 60달러’라는 내용을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철도산업의 부패를 기회로 미국인의 발이 되겠다고 선언했던 미국 자동차회사들의 끝 모를 성장세를 보여 주는 단적인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런 날은 결국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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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심기일전한 포드가 새로운 개념의 머슬카를 내놓았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최전성기를 배경으로 태어난 머슬카는 당대를 지배했던 GM 이 아니라 포드에 의해 붐을 일으켰다. 머슬카의 개척자는 1964년에 데뷔한 포드 머스탱이다.

 

머스탱은 60년대 후반부터 판매의 정석이 된 소위 와이드 베리에이션(하나의 모델을 기반으로 다양한 트림의 가지치기 모델을 제공하는 것)의 개척자다. 지금이야 당연시 되는 내용이지만 당시 미국차 메이커들로서는 획기적인 모델 전략이었다. 데뷔 후 10년 뒤인 1974년 등장한 2세대 머스탱은 석유위기로 인해 보다 온순한 쪽으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인기는 여전했다.
 
미국적 특성이 강한 머스탱의 제 1호 시작차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럽풍’을 표방하는 2인승 스포츠카였다. 머스탱은 1964년, 리 아이아코카가 포드Ⅱ세 및 엔지니어들과 투쟁 끝에 탄생시킨 야생마였다. 당시 청년 중역이었던 아이아코카는 레이싱에의 복귀와 스포츠카의 개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곤궁에 빠진 회사를 구하고자 했다. 미국 전체의 호황이 계속되었지만 포드는 GM의 공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머스탱이다. 물론 흔히들 인식하는 데로 스포츠카라는 장르로 분류되기를 바랐지만 그렇다고 니치Nitche 모델로 소량 생산을 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시판 가격을 최대한 낮추어 설정했다. 결과는 대 히트였고 이것은 미국의 자동차 산업사에서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달성하기 어려운 13개월 만에 100만대 판매라는 대 기록을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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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는 머스탱을 전국 15개 공항, 200개 이상의 홀리데이인 호텔 로비에 전시했다. 1964년 007 시리즈인 골드 핑거에 최초의 PPL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머스탱의 판매를 끌어 올리는데 기여한 것은 1966년 맥 라이스의 노래 ‘머스탱 셀리 Mustng Sally’였다. 연인 사이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머스탱을 사주었는데 그 여자가 남자를 머스탱에 태워주지 않으려 한다는 내용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식 행사에서 자신은 머스탱을 사랑한다는 말을 한 것만 봐도 미국인들의 머스탱에 대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머스탱의 성공으로 쉐보레 카마로와 폰티악 파이어버드, 크라이슬러의 바라쿠다 등이 등장했다. 머슬카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들은 미국의 자동차산업이 최전성기였던 시절의 산물이다. 이들은 전형적인 미국형 스포츠카의 기준이 되었으며 정통 스포츠카가 아닌 스포츠 패션카 장르로도 분류된다. 현대자동차도 1990년 출시한 스쿠프라는 모델에 대해 스포츠 패션카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한편 1950년대 성공의 상징이자 소비자의 자신감을 상징했던 자동차는 1960년대 중반부터는 공공의 적이자 세계 종말을 이끄는 악마라는 시각이 싹 트기 시작했다. 소비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지 않고 오로지 수익성만 쫓는 ‘경제원리’에 입각해 주주들의 배 불리기에만 열을 올린 자본주의의 폐해가 나타난 것이다.

 

*참고로 이 난에 나오는 내용들은 기자가 30년 동안 작성한 내용은 물론이고 여러 서적들에서 발췌한 것도 있다. 그 발췌를 직접 언급하지 못한 것은 후에 별도의 서적으로 발간을 목적으로 한만큼 리스트를 정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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