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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오토뉴스 채영석 국장은 30년 동안 자동차 전문기자로 활동해 왔으며 인터내셔널 엔진 오브 더 이어, 월드 카 오브 더 이어의 심사위원이다. 골드만 삭스 등 투자은행들과 다른 시각으로 산업 분석을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3,000종 이상의 차를 타고 시승기를 쓰고 있으며 세계적인 모터쇼와 기술세미나 등에 참석해 글로벌 차원의 트렌드 분석에 힘을 쏟고 있다. 2013년 골드만 삭스가 유가 200달러 시대를 이야기했을 때 역으로 유가 폭락 가능성이 있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8. 자동차의 산업화 초기에 보여 준 포드의 명과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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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charleychae@global-autonews.com)
승인 2016-12-12 13: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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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여명기에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세가 주도했던 것과 달리 그것을 대중화하고 산업화해야 한다는 데 눈을 뜬 것은 미국이었다. 20세기 10대 발명품 중 8개는 미국에서 나왔다. 라디오를 비롯해 텔레비전 세트, 텔레비전 방송, 항공기, 무선 전화기, 상업용 휴대폰, 개인용 컴퓨터, 대량생산된 자동차 등이 그것이다. 지금도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이 자동차는 자국에서 발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자동차를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관점에서 본 결과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독일에서 시작됐지만 그것을 규모의 경제 차원으로 승화시켜 산업화한 것은 미국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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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동차산업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헨리 포드다. 그는 유럽 여행을 하면서 귀족과 부자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있는 자동차를 대중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만든 것이 1908년 등장한 모델 T(T형 포드)다. 같은 해에 GM Corporation의 전신인 General Motors Company가 윌리엄 듀란트에 의해 설립됐지만 미국 자동차산업 초창기를 장식한 것은 포드였다. 그 해 GM은 8,487대, 포드는 6,181대, 캐딜락은 2,380대를 생산했다. 1907년 자동차 보유대수는 프랑스 4만대, 독일 1만 6,000대, 미국 14만 3,000대였으니 미국이 얼마나 앞선 행보를 보였는지 알 수 있다. 이 해 생산대수는 미국이 4만 4,000대로 프랑스의 2만 5,000대와 큰 차이가 났다.

 

윌리엄 듀란트와 헨리 포드는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다. 유럽인들과 달리 자동차를 더 많은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게 해야 산업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미국에서도 초기에는 자동차가 호사가들의 스포츠 정도로 여겨졌었다. 턱없이 비싼 가격에 기계적 결함이 많았고 그 차가 달릴 만한 도로 조건도 형편없었다. 그것을 대량생산을 통해 대중화에 성공하고 더 나아가 자동차를 산업화하는데 초석을 놓은 것이 헨리 포드다.

 

포드자동차는 1903년 설립됐다. 1913년에는 오늘날 자동차 생산의 기초가 된 조립 라인에 의한 대량 생산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포드자동차가 1908년 출시한 모델 T는 1574만대가 판매된 전무 후무한 모델이다. 헨리 포드를 비롯해 미국 자동차의 산업사를 간략하게 짚어 보며 21세기에 무엇을 생각해야 할 지 고민해 보자. 헨리 포드는 분명 자동차 산업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대량 생산(Mass Production) 기법을 자동차산업에 도입해 자동차 대중화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대량 생산 기법은 아담 스미스 때부터 있었다. 포드자동차 조립공정에 대한 발상은 쇠고기를 손질하는 데 사용되는 시카고 포장 공장의 궤도장치에서 착안한 것이다. 컨베이어를 통해 차대가 흘러가고 분업을 통해 조립을 하는 아이디어를 창안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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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형 포드가 성공을 거두자 디트로이트 루즈 강변에 세계 최대의 공장을 짓고 본격적인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1920년경에는 하루에 7천대씩의 자동차가 굴러 나왔다. 계속 차 가격을 낮추는 저가 정책에 주주들이 반발하자 헨리 포드는 불평하는 주주들의 주식을 몽땅 사들여 입을 막는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포드는 투자를 많이 하지 않고 소 품종을 다량으로 생산해 수익성을 높였다. 그로 인해 자동차 판매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1908년 출고 당시 950달러였던 T형 포드의 시판 가격이 1914년에는 490달러, 1925년에는 260달러까지 떨어졌다.

 

T형 포드는 원래 녹색 바탕에 빨간 무늬가 들어가 있었는데 한 엔지니어가 검은 색이 빨리 마른다는 것을 알고 검은색으로 통일됐다. 그래서 나온 말이 ‘차의 색깔이 검기만 하면 어떤 색이든 관계없다.’ 는 말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포드는 자동차는 검은색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됐다.  포드는 당시 10만 명이 넘는 포드차의 종업원들과 가족들이 자동차를 갖도록 T형을 개발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말했다. 거의 1/10 수준으로 떨어진 자동차 가격으로 인해 그때까지 귀족들의 사치품으로만 여겨졌던 자동차가 대중의 발이 되기 시작했다. 중산층 들도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됐고 그것은 결국 자동차의 수요 촉발로 이어졌다. 그것이 모터리제이션(Motorization) 의 시작이다.

 

모든 것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돈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던 시대였던 만큼 ‘사악한 사치품’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23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그때까지와 달리 마차가 아닌 자동차를 타고 취임식장에 입장하면서 사람들은 ‘자동차 소유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전체 공정에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한 결과 12시간 반 걸리던 차대(車臺) 제작시간이 1시간 반으로 줄었다. 1913년 디트로이트 북쪽의 하일랜드 파크에서 일어난 혁명이었다. 1914년 포드는 연간 24만 8,000대를 생산했다. 24초당 한 대씩이다. 시장 점유율은 1908년 9.45%에서 48%까지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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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초 포드는 신년 축하 파티에서 파격적인 내기를 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파티에 모인 손님들에게 그 해 말까지 모델 T 30만대를 사간 고객 전부에게 틀림없이 개인당 50달러의 현금 보너스를 지급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 이야기는 곧 당시 미국사회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과연 그 해 12월말까지 30만 8,000대가 팔려 나가 내기를 걸었던 보너스 총 1,500만불을 지불한 일도 있었다.

 

대량생산 기법은 기업주에게는 혁명이었지만 당시의 공장 노동자에게는 형벌에 가까운 것이었다. 단순 반복 노동이 끼치는 폐해가 심각했던 것이다. 오늘날에야 노동자들의 자세를 좀 더 편하게 해 '근 골격 질환' 등 직업병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강구되고 있다. 더불어 자동화의 발달로 근로자들 완력에 의지 하지 않고도 돌아가는 시스템이 도입되어 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사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런 작업방식은 근로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기계부품으로 전락했다. 라인을 현장 종업원들이 우마처럼 끌어야만 했다. 이동하던 엔진이 떨어져 근로자의 다리를 부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포드사는 컨베이어 벨트의 성능을 개선해 꾸준히 확대 적용했다. 생산성 향상의 방법으로 1대당 완성 시간을 줄이기 위해 노동자를 혹사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면 감독의 채찍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라인은 점차 빨라졌지만 종업원들은 기진맥진했고 급기야는 서로 달려들어 난투극에다 살인까지 했다.


직공들이 신경 쇠약이나 정신 착란에 걸린다는 소문이 돌았고 결근과 중도 탈락이 줄을 이었다. 그래서 자동차 공장의 이직률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포드의 한 공장에는 연간 소요 인원이 14,000여명이었으나 한 해에 7만명을 새로 고용해야 했다. 노동자들이 생소한 생산 현장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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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헨리 포드는 다시 한 번 혁명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그 때까지 하루 12시간 일하고 2.34달러를 지급했던 급료를 8시간에 5달러로 인상한 것이다. 당연히 동종 업계로부터 거센 반발에 부딛혔지만 그는 밀어 붙였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디트로이트 인근은 물론이고 카나다에서까지 포드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몰려 들었다. 
공장 노동자들의 이직률은 당연히 떨어졌고 그들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갔다. 더불어 수입도 늘었고 저축도 가능해졌다. 노동자들도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자동차회사들은 생산 시설을 확충했다. 그를 위해 인원을 보충한 것은 당연지사. 두 배나 오른 임금 덕분에 포드사의 노동자들도 포드자동차를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자동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 여가를 즐기는 최초의 ‘중산층’이었다. 극소수 부자와 귀족들의 오락품이었던 자동차는 보통 사람들의 필수품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선 순환의 반복이 자동차산업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또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수익이 증가하고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면서 노조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는 당연히 정치적인 면에서 권력자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 포드는 독일인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은 전체주의자들로부터 호감을 샀다. 스탈린이나 히틀러도 그를 칭송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자동차가 산업이 되는 길을 찾자 그것을 다시 유럽인들이 권력 유지를 위한 홍보수단으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철도나 선박보다는 자동차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게 하는 로비에 성공했고 미국의 자동차산업은 날개를 달았다. 1918년 미국 자동차 생산의 50%가 포드사 제품이었을 정도로 포드의 대량생산 기법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포드는 단지 노동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임금을 올렸지만 그들은 새로운 소비자가 되어 판매에 날개를 달았다. ‘포드주의’라 불리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가 최초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 1921년에 세계 최초로 자동차 할부금융이 도입되면서 자동차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기에 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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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가 노동자들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임금을 올렸지만 그것은 자본과 노동의 합리적인 결합에 의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로 인해 포드주의가 마르크스주의를 이겼다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포드주의에 대한 정의는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 기능성과 효율성을 중시, 국가와 정부의 규제, 대중문화의 동질화 등이라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이것은 국가주의와 결합해 정치인들에게 이용수단으로서의 이론을 제공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이전부터 자동차는 정치바람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이 1920년이었으니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지금과는 큰 괴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동차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바꾸는데도 일조했다. T형 포드가 탄생할 즈음에 미국에서는 여성 운전자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부자들의 과시 수단이라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남자들이 여자들까지 운전을 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했다. 그런데 자동차회사들이 로비를 통해 분위기를 바꾸었다. 1920년대 미국 여성운전자의 비율은 5~20% 가량이었다. 투표권을 인정받으면서 차를 타고 선거운동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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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1902년에 문을 연 미국 최대의 백화점 메이시스(Macy’s) 등이 여성 고객을 끌어 들이기 위해 문화센터를 만들었던 것과 어울려 여성의 사회활동은 더욱 속도를 냈다. 메이시스 백화점은 소비를 장려하기 위해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환경을 만들었다. 문화활동을 통해 여성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려 했다. 여성들은 그에 반응했고 소비는 급증했다. 백화점의 성장과 마찬가지로 자동차도 남자들의 세계에 머물다가 여성들에게 사랑받으면서 본격적인 성장을 하게 됐다.

 

동시에 자동차는 사회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도구로 인식되면서 사회적인 갈등 또한 심해졌다. 대중가요를 통해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역으로 자동차를 동원해 사랑을 표현하는 노래도 등장했다. 미국에는 그때 이미 드라이브 인 레스토랑이 생겨났다. 모텔이라는 용어도 1925년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이는 부적절한 관계가 널리 퍼졌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윤락녀들도 자동차로 자신의 등급을 표현했다. 이 즈음 등장한 것이 조수석 시트를 눕히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섹스를 위한 것이었다.

 

1920년대 세계에서 가장 컸던 헨리 포드의 리버루지(River Roosi)공장 입구로 철강석이 들어가면 출구에서 하루에 7,500대의 포드차가 굴러 나와 미국의 자동차도시 디트로이트는 그야말로 포드에게 자동차왕이라는 명성을 안겨 주었다. 1922년에는 고급차 메이커인 링컨을 인수했다. 1927년에는 포드의 ‘철강에서 자동차까지’라는 구상을 근거로 철강 생산설비를 갖추어 미국 최대의 일관 생산공장인 루지(Rouge)공장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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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미국의 자동차 생산은 300만대까지 확대되었고 1929년에는 2차 대전 전의 최고기록인 459만대를 기록했다. 이 즈음에는 대체 수요가 중심이 되어 상급차 수요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27년 하일랜드 파크 공장이 디어본의 루지로 옮겼을 때는 1,500만대의 모델T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세계 전체 자동차의 절반이 포드사에서 만들어졌다. 포드의 생산방식은 다른 회사로, 다른 산업으로 전파되었고 자동차공업은 철강, 고무, 석유, 도로건설 등 수많은 연관 산업들을 발달시켰다. 미국은 이러한 생산혁명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의 발원지인 영국을 제치고 20세기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며 세계로 수출된 포드주의는 각국의 생활양식을 변화시켰다.

 

오늘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의한 생활수준 향상 없이 ‘대중’과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노동 소외와 환경 오염이라는 해결 과제를 인류에게 안겼다. 그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제약 받지 않는 마약인 자동차를 사람들에 손에서 떼어 놓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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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단종될 때까지 20년 동안 엔진도 바꾸지 않고 검은 색만을 사용한 T형 포드는 무려 1,574만대 이상이 전 세계에 판매됐다. 단일 차종으로 모델체인지 하지 않고 이만큼 팔인 차는 지금까지 없다. 이 시절 우리나라에도 대량 상륙해 자가용과 영업용으로 사용됐는데 한 대 값이 4천원이었다. 쌀 한 가마에 10원 정도 할 때였으니까 4백 가마는 팔아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해외로의 진출도 1910년경부터 T형 모델을 수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에서 조립생산을 하고 20년대에 들어서는 100% 자회사 설립을 기본 전략으로 24년에는 영국, 남 아프리카, 25년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멕시코 등에 생산 조립거점을 구축했다.

 

그런 반면 20년대 중반부터는 시장 수요의 다양화에 의해 단일 차종의 양산만을 고집하던 포드의 승용차 점유율은 30년대가 되어 20%로까지 떨어졌고 그때부터 1949년까지는 크라이슬러 다음의 자리로 밀려났었다. 포드는 흑인과 여성, 전과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고용을 많이 했다. 1919년에 전체 인력 4만 4,569명 중 9,563명이 장애인이었으며 전과자들도 500~600명에 달했다. 이로 인해 헨리 포드에 대해 인도주의자라는 평가가 있기도 했었으나 그는 그 말을 싫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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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는 노동 통제를 위한 장치들을 고안하는데도 천재였다. 그의 공장에는 작업 시간에 화장실을 자주 가는 등 비 적격자를 골라내기 위해 ‘감시조’가 편성됐고 감시조에 걸린 사람들은 해고 전단계인 ‘대기조’로 분류됐다. 권투선수였던 전과자들을 경호원으로 고용해 악명을 떨쳤고 노동조합은 자동차회사들 중 가장 늦은 1941년에 도입했다. 포드사에는 ‘사업주의 첩자가 자동차만큼이나 많다.’는 말도 있었다. 그는 반 유태주의자로서 히틀러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역사는 그를 20세기 산업혁명의 도구인 자동차를 대중화하고 산업화하는데 기여한 자로만 기억하고 있다. 1947년 헨리 포드는 8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고향 미시간주 디어본에 포드자동차의 본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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