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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방대한 문헌과 사진자료를 토대로 자동차문화 전반에 관한 조사/연구/분석/저술/방송/강의를 통해 우리나라 자동차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소장의 자동차 이야기 코너입니다.

최초의 대량생산 순정품 차 새나라

페이지 정보

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5-04-04 16:37:39

본문

최초의 대량생산 순정품 차 새나라

워커힐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던 1962년 4월, `새나라`라는 이름의 날씬한 양장미인 일제 소형승용차가 서울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이즈음 5․16혁명정부는 국가재건 방안의 하나로 국내 자동차공업을 일으켜야겠다는 취지 아래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을 제정하여 공포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외국 자동차 도입을 억제하려던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정부는 국민에게 알리지도 않고 국내사업가도 아닌 재일교포에게 전격적으로 새나라자동차회사의 설립을 허가해 주었다.
새나라자동차회사는 곧 배기량 1천200cc급인 l일본 닛산자동차제품인 블루버드 완제품을 400대나 면세로 들여와 자동차공업을 독점하도록 특혜를 주어 국내 자동차업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다.
새나라가 나오자 이때까지 판을 치던 최초의 국산차 시발의 인기가 급격히 떨어져 최고 300만환하던 것이 하루아침에 (50만환은 화폐개혁 후 5만원으로)폭락하여 시발택시업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400대의 새나라 중 150대는 외국인 관광용, 250대는 일반 관광용으로 쓰자던 당초의 계획을 벗어나 1962년 5월에 아시아영화제가 열리면서 일반택시로 둔갑해 버렸다.
1963년 1월 서울시내 택시 2,700대 중1,050대가 새나라 택시였고, 이해 4월부터 택시미터기 부착이 의무화되어 택시요금시비를 근절시켜 갔다.
새나라가 얼마 안가 국민들로부터 의욕을 사기 시작할 즈음 일본 미쓰비시제 콜르 1500이라는 완제품 승용차 300대를 연구명목으로 들여왔으나 자가용과 외국인용으로 팔아 의혹을 더욱 깊게 했다.
때를 맞추어 워커힐 건축, 증권파동, ‘빠징꼬’ 기계의 부정 도입사건과 함께 새나라는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휘말려 얼룩진 첫 양장미인 차가 되었다.
어째던 새나라차는 한국의 자동차공업 현대화의 기수가 됐으며 새나라공장은 1962년 8월에 경기도 부평에서 준공되어 닛산의 블루버드를 반제품식으로 들여와 조립하다가 외화사정의 악화로 자재 도입을 할 수 없어 1963년 5월 문을 닫을 대까지 2천700여 대를 만들었다. 그 후 이 현대식 공장은 1965년 신진자동차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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