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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방대한 문헌과 사진자료를 토대로 자동차문화 전반에 관한 조사/연구/분석/저술/방송/강의를 통해 우리나라 자동차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소장의 자동차 이야기 코너입니다.

한국최초-국산자동차 1호 시발의 탄생

페이지 정보

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4-11-05 18:24:35

본문

한국최초-국산자동차 1호 시발의 탄생

제2차 세계대전과 6`25사변을 겪고 난 우리나라 자동차는 폐허의 위기를 맞아 도시나 지방의 자동차교통은 전멸상태에 가까웠다.

전쟁이 끝나자 다행히 유엔군들이 전장에서 쓰던 군용폐차가 쏟아져 나와 폐허였던 우리나라 자동차교통이 숨을 쉴 수 있었다. 이때부터 군용폐차 재생시대를 걷게 되었고 트럭이나 버스는 대부분 미군의 GMC트럭을 개조한 것이었다.

자가용 역시 귀해 미군이 불하한 폐차지프를 재생시켜 드럼통을 펴서 만든 상자형 차체를 씌워 타고 다녔으나 이것도 정부고관 아니면 부자들 또는 인기 연예인들의 독점물이었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씨가 불하받은 지프의 변속기, 차축 등 뼈대만 이용하여 드럼통을 펴서 만든 지프형의 첫 국산차 `시발`을 1955년에 내놓았다.

비록 지프를 닮았지만 우리 손으로 처음 만든 엔진을 얹은 첫 국산차는 부속품의 국산호율이 50%나 되어 긍지가 대단했다. 처음에는 한 대 만드는 데 4개월이 걸렸던 시발의 차량 가격은 8만환이었으나 사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55년 10월 서울 창경원에서 열렸던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하여 인기를 끌어 뜻하지 않게 최우수상품으로 선정되어 대통령상을 받아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시발의 주가는 하룻밤 사이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다. 을지로 입구에 있던 천막공장 앞에는 시발을 서로 먼저 사가려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대통령상을 받은 후 한 달 도 못되어 1억환의 계약금이 들어와 공장을 사고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영업용택시로 인기가 높아 생산능력이 계약을 미쳐 따라가지 못했다. 얼마 후에는 시발투기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자들 사이에는 ‘시발계’ 가지 유행하여 프리미엄을 얹어 전매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렇게 하여 최초의 국산차는 1963년까지 총 2천여대를 만들어 내고는 문을 닫았으나 전후 황폐했던 우리 자동차교통 재건과 자동차산업 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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