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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교수는 기아자동차 디자인실에서 크레도스 책임디자이너를 역임했으며 기아자동차 북미디자인연구소 선임디자이너를 지내기도 한 자동차디자인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자동차 전문 디자이너입니다. 현재는 디자인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구상교수의 자동차 디자인 이야기는 독자여러분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자동차 디자인에서 일본의 영향 (1)

페이지 정보

글 : 구상(koosang@kookmin.ac.kr) ㅣ 사진 : 구상(koosang@kookmin.ac.kr)  
승인 2020-11-23 12:25:44

본문

대법원의 일본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시작된 일본 정부의 보복성 수출 규제는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대일 의존도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일본 상품과 차량의 불매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에 필자가 한국자동차공학회에 투고한 논문을 통해 우리나라 자동차 디자인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그 논문을 발췌하여 두 번으로 나누어 정리하도록 한다.

글 / 구상 (자동차 디자이너, 교수)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업 분야는 근대화 초기에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소재나 부품, 설계 등을 바탕으로 시작됐다. 또한 한국 전쟁으로 대부분의 기반 시설이 파괴된 상태에서 해외 원조를 통해 재건이 시작되었으므로, 원조국의 하나였던 일본의 영향은 불가피했을지 모른다.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 또한 예외적이지 않은데,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자동차 메이커가 초기에 일본으로부터의 기술 도입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와서 자동차는 반도체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출 품목들 가운데 하나가 됐을 정도로 국제적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으며, 우리나라의 모든 자동차 기업들이 각 기업에 소속된 인 하우스 디자이너(in-house designer)에 의해 차량의 내·외장 디자인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근래에 개발된 우리나라 자동차 메이커 고유모델의 내·외장 디자인의 완성도는 해외 시장에서 일본 메이커의 차량들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인식되며 경쟁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의 자동차 디자인에서 일본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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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은 1955년에 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국산 자동차 「시발(始發)」의 개발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이후 실질적 공업제품으로서의 차량 개발과 생산이 시작된 것은 1962년에 현재의 「한국GM」의 전신이었던 「신진공업사」가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설립되어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 닛산과 토요타 등과의 기술제휴로 각각 「신성호」, 「새나라」, 「퍼블리카(Publica)」, 「코로나(Corona)」 등의 승용차 부품을 수입하여 면허 생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현대자동차는 1967년에 설립되었으나, 그 이전에 1940년부터 현대그룹은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1968년에 미국의 포드자동차(Ford Motor Company)와 면허 생산 계약을 맺고 약 66만 제곱미터의 울산공장을 지어 중형 승용차 와 트럭을 조립생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아자동차의 모태가 된 「경성정공(주)」가 1944년에 설립되어 국산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1961년에 일본의 「혼다기연(本田機硏)」과 기술 제휴를 하면서 「기아기연(起亞機硏)」으로 상호를 바꾸고 혼다기연으로부터 부품을 들여와 2륜 차를 제조하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로 미국의 「카이저(Kaiser Motor Company)」와의 기술제휴로 「신진지프」가 생산되기 시작하는 등 1969년부터는 차종의 다양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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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고유모델 차량의 개발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1972년부터 실행되는 것에 의해 추진력을 얻게 된다. 여기에는 정부의 장기적인 조선공업 진흥계획과 자동차공업 진흥계획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유모델 개발은 3공화국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과 차량 국산화 정책과 동일한 흐름 속에서 추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우리나라 자동차 메이커의 기술력 부재는 외국 메이커로부터 부품과 도면을 제공받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내·외장 디자인은 그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으므로, 기술제휴 메이커에서 도입한 차량을 그대로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유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적 기술로서 새로운 디자인 개발과 아울러, 전문적인 디자인 인력 양성도 요구되는 것이다.

「피아트(Fiat) 124」 모델을 1970년부터 조립생산하기 시작한 「아시아 자동차공업(亞細亞 自動車工業)」은 1965년에 이탈리아의 「피아트(Fiat)」와 합작으로 설립됐으나, 판매 부진으로 3년 만에 생산을 종료한다. 그 과정에서 1969년에 동국제강의 인수를 거쳐 1976년에 기아산업에 인수되어 군용 차량과 버스 등을 생산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자동차를 생산했던 신진자동차는 1960년대에 토요타의 차량을 들여와 생산하는 과정을 통해 기술을 이전받고 있었다. 그러나 토요타가 정치적 상황 등을 이유로 한국에서 철수하게 되자, 새로이 미국의 GM과 기술 제휴를 체결하면서 「GM코리아」로 개칭하게 된다. 이후 1972년에 내놓은 차량이 「쉐보레(Chevrolet) 1700」이었는데, 이 차량은 미국 시장용 모델이 아닌 호주의 「홀덴(Holden)」이 개발한 「LJ 토라나(Torana)」승용차를 도입한 것이었다. 그런데 차체 부품은 호주의 홀덴으로부터 들여왔지만, 엔진과 트랜스미션은 독일의 「오펠(Opel)」에서 수입하여 조립 생산하는 방식으로 1972년 9월부터 시판된다.

이후 1975년에 현대자동차에서 1,200cc 급 엔진을 탑재한 고유모델 「포니(Pony)」가 등장하자, 상대적으로 연비가 낮았던 쉐보레 1700은 판매가 크게 감소한다. 이후 1975년 12월에 생산이 중단되는데, 출시 이후 3년 4개월 동안 8,105대가 판매된 뒤였다. 그리고 1976년에 후속 차종으로 고급화 된 「카미나(Camina)」를 출시한다.
1978년부터 새한자동차는 미국 GM의 「월드 카 계획(World car Project)」에 참여해 독일 「오펠(Opel)」과 일본 「이스즈(Isuzu)」가 공동 개발한 「제미니(Gemini)」 승용차를 조립 생산한다.5)

현대자동차가 1971년에 내놓은 「뉴 코티나」는 영국 포드로부터 도입한 「T.C 코티나(Cortina)」의 부품을 조립생산 한 것이었는데, 1971년 출시 당시의 국산화율은 41%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편으로 현대자동차는 포드자동차와 합자회사를 준비하지만, 기술료 지불 금액 등에 대한 이견(異見)이 커 협상이 결렬된다. 이를 계기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평소에 과업이라고 생각하던 독자적인 자동차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1973년에 현대자동차의 정세영 대표이사 사장이 일본의 미쓰비시(Mitsbishi) 자동차를 방문해 기술제휴 협약을 맺고 소형 승용차 「랜서(Lancer)」의 엔진과 변속기를 도입한다. 그리고 내·외장 디자인의 개발은 이탈리아의 자동차 전문 디자이너 조르제토 쥬지아로(Giorgetto Giugiaro; 1938~)가 이끄는 「이탈디자인(Ital Design)」에 의뢰하게 된다.2) 이후 양산형 「포니(Pony)」 승용차와, 콘셉트 카로 제작된 「포니 쿠페(Pony Coupe)」가 1974년 10월 토리노 모터쇼에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로 발표된다. 포니의 발표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6번째로 독자적인 고유모델 승용차를 보유한 국가가 된다.

기아산업은 일본의 동양공업(東洋工業; 이후에 마쓰다〔Mazda〕로 바뀜)에서 들여온 1,000cc급 소형 승용차 「파밀리아(Familia)」를 「브리사(Brisa)」라는 이름으로 1973년부터 생산하였고, 1978년부터는 1,300cc 엔진의 준중형급 승용차 「그랜드 파밀리아(Grand Familia)」를 「브리사(Brisa)II」, 「K303」 등의 이름으로 생산한다. 이들 두 종류의 승용차를 생산하면서 기아산업은 엔진을 국산화 시켰으나, 차체는 기본적으로 동양공업의 차량을 거의 그대로 조립생산 한 것이었다. 또한 기아산업은 이탈리아의 피아트로부터 2,000cc 중형 승용차 「피아트132」의 부품을 들여와 1979년부터 조립생산 한다. 그리고 프랑스의 「푸조(Peugeot)」와도 기술제휴를 맺고 부품을 들여와 대형 고급승용차 「푸조 604」를 생산하는 등 생산 차종을 확대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현대자동차는 독일의 포드로부터 6기통 엔진을 탑재한 대형 고급승용차 「그라나다(Granada)」의 부품을 들여와 조립 생산하게 된다.

19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중형급 이하의 승용차들이 뒷바퀴 굴림 방식보다 효율성이 높은 앞 바퀴 굴림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현대자동차가 1985년에 내놓은 「엑셀(Excel)」은 우리나라 최초의 앞 바퀴 굴림 방식의 승용차였는데, 엔진과 변속기는 일본 미쓰비시의 「미라지(Mirage)」 승용차의 것을 국산화시킨 것이었다. 내·외장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쥬지아로가 디자인해 1986년부터 국산 승용차 최초로 미국에 수출되어 시판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개발되는 승용차들은 대부분이 앞 바퀴 굴림 방식을 가지게 된다.

1980년대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산업, 그리고 새한자동차에서 대우자동차로 이름을 바꾼 주요 3사(社)와 아울러, 신진지프, 동아자동차, 거화(巨和)자동차 등을 거쳐 쌍용그룹에 인수된 쌍용자동차, 그리고 기아자동차에 합병된 아시아자동차 등의 모두 다섯 개의 메이커 체제가 자리 잡는 등 산업 구조가 갖추어진 시기이다.
1981년에 시행된 정부의 자동차산업 합리화조치에 따라 화물차만을 생산하던 기아자동차는 1986년부터 승용차생산이 다시 허용되면서 기술제휴 메이커였던 일본의 마쓰다로부터 「카펠라(Capella)」와 「페스티바(Festiva)」를 들여와 각각 「콩코드(Concord; NB-V)」와 「프라이드(Pride; NB-III)」 등의 이름으로 시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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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고도성장과 아울러 조정기가 함께 존재했던 시기이다. 고유모델의 개발이 궤도에 오른 현대자동차 뿐 아니라, 기아자동차와 대우자동차, 그리고 쌍용자동차 역시 고유모델의 개발에 뛰어들었으나, 각 메이커의 개발 유형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대우자동차는 이탈리아 「베르토네(Bertone)」와 협업으로 「에스페로(Espero)」를 개발한다. 또한 일본 「스즈키(Suzuki)」의 「알토(Alto)」 승용차를 들여와 엔진을 660cc에서 800cc로 늘리고 전면 디자인을 변경해 경승용차 「티코(Tico)」를 내놓는다. 또한 1994년에 일본 혼다자동차로부터 「레전드(Legend)」승용차의 2세대 모델을 들여와 「아카디아(Arcadia)」라는 이름으로 판매했으나, 이 차량은 완성된 차량을 수입해 대우자동차의 이름으로 판매한 것이어서 본 고찰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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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는 경승용차 「아토즈(Atoz)」를 1997년에 내놓는다. 또한 1993년부터는 소형 승용차의 엔진과 변속기 등을 자체 개발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일본 미쓰비시로부터의 기술 도입은 줄었으나, 1999년에 대형 고급승용차 「에쿠스(Equus)」를 그들과 공동개발하면서 V형 8기통 가솔린 엔진의 설계와 제조 기술을 도입한다.
기아자동차는 고급승용차 「포텐샤(Potentia)」와 「엔터프라이즈(Enterprise)」의 개발을 위해 일본의 마쓰다로부터 「루체(Luce)」와 「센티아(Sentia)」 등 두 종류 고급승용차의 제조기술을 각각 1992년과 1997년의 시판을 위해 도입한다.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에서 SUV의 대중화에 따라, 쌍용자동차는 차체(車體)와 차대(車臺)가 구분된 구조에 후륜구동방식 기반의 4륜 구동방식의 SUV를 개발한다. 또한 고급승용차 「체어맨(Chairman)」 개발을 위해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 Benz)」로부터 6세대 「E 클래스」(W124)의 기술을 도입한다. 차체 디자인은 영국 RCA의 켄 그린리(Ken Greenly) 교수의 디자인으로 개발되었다.

1993년에는 삼성그룹이 정부로부터 자동차산업 진출 승인을 얻어 삼성자동차를 설립하고, 일본의 닛산에서 중형 승용차 「세피로(Sefiro)」와 준중형 승용차 「블루버드(Bluebird)」 차량의 기술과 부품을 공여 받아 일부 디자인을 변경해 개발한 차량을 1997년부터 시판한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199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일곱 개의 자동차 메이커가 다양한 차종을 생산하며 경쟁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전 세계적인 자동차산업의 인수·합병의 영향과 함께, 우리나라가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인해 국제통화기금의 관리에 놓이는 등 불경기의 여파로 기아자동차가 유동성 위기를 맞게 되어 현대자동차로 합병된다. 한편 삼성자동차 역시 제품 포트폴리오 빈약에 의한 수익성 악화로 「르노-닛산」그룹으로 매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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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고도성장 이후 세기 말에 일어난 전 지구적 인수합병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 역시 구조조정을 겪게 되면서 국제적 규모로 확대되거나 다국적 기업화되는 등의 전환을 맞게 된다. 자동차산업은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 실현이 산업지속성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임이 다시 한 번 입증된 것이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간 700만대 생산 규모의 한국 국적의 자동차 메이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단일 자동차 제조사 내에 두 개의 개별 브랜드를 가지는 체제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플랫폼 통합과 동시에 브랜드 별 특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이후 기아 브랜드는 수석 디자이너로 폭스바겐의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Peter Schreyer)를 2006년에 영입해 젊은 소비자를 겨냥한 기능적 디자인 특징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기아자동차는 라디에이터 그릴의 특징적 조형을 브랜드 아이덴티티 요소로 활용하는 유럽 자동차 브랜드의 전략을 취하게 된다. 이에 대비되어 현대자동차는 공통된 조형요소를 가지면서도 다양한 디자인을 지향하는 성향으로 대별된다. 엔진은 현대자동차가 2004년에 독자 기술의 「쎄타(theta[θ])」 엔진을 개발해 기술 자립을 이루게 된다.

현대자동차는 도시형 SUV 「싼타페(SM)」를 중형 승용차 쏘나타의 플랫폼을 바탕으로 개발하고, 기아자동차의 「쏘렌토(BL)」와 「모하비(KH)」는 1세대 스포티지(NB7)와 동일하게 차체와 차대가 구분된 구조(body on frame)를 유지한다. 이후 2세대 「스포티지(JE)」는 현대자동차의 아반떼 플랫폼을 「투싼(JM)」과 공용해 개발된다.

한편 쌍용자동차는 적자 누적으로 2004년도에 중국의 「북경기차(北京汽車)」에 합병된다. 2000년대의 우리나라 자동차 메이커의 디자인 개발에서의 특징은 대부분 인 하우스 디자이너에 의해 디자인을 개발하지만, 일부 차종을 보다 창의적 스타일의 탐구나 수출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여 이탈리아의 「피닌파리나(Pininfarina)」와 「이탈 디자인(Ital Design)」 등 유럽의 디자인 업체와 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동차산업에서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진 글로벌 인수·합병이 마무리되고 국내 기업과 다국적 기업으로의 정리가 마무리되면서, 2010년대에는 각 자동차 메이커들이 그간에 정착된 차종들을 중심으로 고유모델을 개발하게 된다. 엔진과 변속기를 포함한 차량의 플랫폼(flat form)의 개발도 메이커 별로 거의 독자적으로 설계하거나, 혹은 도입된 원형을 국내 환경에 맞도록 하는 수정하는 설계를 통해 개발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이후의 2000년대 이후는 이 다음의 글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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